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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2022년 4월] 기고 에세이

[나외 4·19 혁명] “나가자” 외침에 순식간에 1000여 명이 모였다

이기방 기소장학재단 이사장


“나가자” 외침에 순식간에 1000여 명이 모였다


이기방
영어교육59-63
기소장학재단 이사장


경무대 앞에서 총격, 곳곳에 핏자국
쓰러진 부상자 업고 병원으로 뛰어
대학교수단 시위대 호위 수행 맡아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3·15 부정선거, 마산사태 등에 대하여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을 때, 나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 테러행위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같은 날 저녁 학과 친구들과 시위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고, 이튿날 4월 19일 9시 강의가 시작될 무렵 나는 강의실을 뛰어다니면서 “나가자” 외쳤다. 학교 운동장에는 순식간에 학생들이 모여 함성과 함께 교문 밖으로 내달렸다.

우리의 행진은 7~8명씩 스크럼을 짜 대오가 만들어졌고, 럭비부 학생들과 나를 포함한 2학년 학생들이 대열을 선도했다. 교문에서 피천득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만류를 하였지만, 우리들은 부정선거 규탄 구호를 외치며 용두동-신설동-동대문-을지로-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으로 행진했다. 행진 도중 몇 개 파출소를 지났지만 큰 충돌 없이 국회의사당까지 도달했다.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는 시위대로 넘쳐났다. 국회의사당 앞 세종로 거리는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밀물처럼 계속 모여들어 태평로, 서울시청 앞 도로를 가득 메웠고 흥분과 절규의 격랑 속에서 부정선거 규탄 성토가 계속됐다. 그러다 11시 반경부터 “경무대로 가자”라는 구호와 함께 광화문, 중앙청을 거쳐 효자동으로 큰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의동 파출소 부근에 도달했을 때 바리케이트와 최루탄, 소방차를 동원한 강력한 경찰 저지가 있었으나, 시위대는 도로공사로 파헤쳐진 대형수도관을 밀며 간신히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해무청 앞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우리 서울사범대 대열은 동국대 및 일부 고등학생들과 뒤섞여 삼일당, 진명여고를 지나 효자동 전차 종점 근처까지 접근했다. 바로 경무대 앞이다. 바리케이트 철조망과 10여 대의 소방차들이 포진해 있었고, 전투복 차림의 중무장 경찰관 부대가 총을 겨눴다. 움찔했지만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시위대와 합세하여 맨손으로 철조망을 제거하면서 한발씩 전진했다.

마침 근처에 정차해 있던 전차를 끌어왔고 이를 방패 삼아 소방차 물대포를 뚫고 경무대 쪽으로 나가자 경찰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포탄은 무차별 실탄 발사로 이어졌고, “실탄 발사다. 엎드려라”라는 고함과 함께 군중들이 길 양옆에 일제히 엎드려 피신했다. 마치 강풍에 쓰러지는 갈대숲과 같았다. 나는 간발의 차로 총탄을 피했다.

총성이 멈춘 후 정신을 차려보니 조금 전 데모대의 함성은 정적으로 변했고, 희생자들의 신음소리와 붉은 피가 길바닥 이곳저곳에 낭자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총격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길가 양옆과 민간가옥 등에 숨어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몰려나왔다. 나는 길거리에 나뒹굴던 부상자를 몇 사람과 힘을 합쳐 가까운 순화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병원에는 이미 많은 부상자들이 모여들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다시 거리로 나와보니 지프차, 소방차, 앰뷸런스들이 부상자들을 싣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군중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 이곳에서 총탄에 맞아 희생했다. 그 중엔 우리 사범대학생 손중근 동문도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아침, 모교 재학생 수천 명이 시위에 가담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 나가고 있다.


경무대 앞의 총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후 경복궁 서문 근처에 집결, 덕수궁 뒤편 대법원 청사로 가서 부정선거 규탄과 성토를 계속했다. 이때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등에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서울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져 우리는 일단 학교로 귀환하기로 했다.

귀교 도중 본 시가지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파출소가 불타고 일부 경찰관들이 도주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로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교복 입은 우리를 환호했으나, 우리는 계엄령이 선포된 것을 알리면서 질서유지와 자제를 부탁했다. 그날 하루 종일 굶었지만 배고픈 것도 몰랐고, 오후 6시경 강의실에 도착하여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우리들은 4월 20일 휴교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국회의사당, 이기붕 사옥, 자유당 당사 등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계속함과 동시에 불량배들의 탈선 행위를 막는 데 앞장섰다.

특히,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대통령 하야 촉구 시국선언문 발표 때에는 서울의대 교수회관에서 국회의사당까지 호위, 수행하였다. 거리의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이때의 교수단 시국선언문과 시위는 자유당 정권 붕괴와 4·19혁명 성공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에는 대학생 수습대, 국민계몽단의 일원으로 사회질서 유지활동, 여름방학 때에는 농촌계몽대로 경북 상주군 낙동면 일원에서 열정을 다해 뛰어다녔다. 나는 이런 역사적 사건에 기여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