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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2022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정든 집 팔아 내놓은 20억원…“모교가 세계적인 대학되는 데 보탬되길”

고광석 아람기획 회장


정든 집 팔아 내놓은 20억원…“모교가 세계적인 대학되는 데 보탬되길”

고광석 (회화59-63·법학63-66)
아람기획 회장



평생 은행 샐러리맨으로 근검절약해 모은 돈
“미래지향 공명정대한 지도자 양성해달라”

거지에게도 상 차려주던 어머니에게 배워
4·19 때 같이 시위한 친구 총탄에 잃어



“재학생 후배들을 위해 20억원을 기부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돼요?”

지난해 늦가을, 동창회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0억원이면 장학빌딩 건립 이후 가장 큰 금액의 개인 기부액이다. ‘고광석’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40여 년 살던 집을 곧 처분해 매각 금액이 들어오면 절차를 밟아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실제 기부 의사를 밝히고 주저하다 연결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통장에 입금되기 전까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3월 중순 “최근 집 매각 대금을 받아 송금하려 한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 통화 다음 날, 장학금 담당 직원이 자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광석 동문은 20억원을 흔쾌히 쾌척했다.

그가 광주서중·일고 재경총동창회지 제56호에 기고한 ‘여든에 접어들어 지난날을 되돌아보며’에는 “자유·민주·정의의 깃발 아래 우리나라 국리민복을 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분야의 미래지향적이고 공명정대한 지도자 양성을 위해 ‘고암 늘푸른 꿈나무장학재단’ 설립자금으로 20억원을 서울대에 기부한다”고 썼다. 본회 장학재단(관악회)은 기부자의 뜻이 담긴 명칭의 특지장학금을 마련해 주고 있다.

4월 5일 송파구 가락동 자택에서 만난 고 동문은 주머니 부분이 해진 겨울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부인은 “우리 동네에서 차가 없는 집은 우리집밖에 없었다”며 “한참 훗날 차량을 구입하는 등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았다”고 했다.


-평생 은행원으로 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부를 일구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운이 좋았어요. 미래를 위해 사 뒀던 부동산이 개발이 되면서 많이 올랐습니다. 허튼 곳에 안 쓰기도 했고요. 웬만하면 구내식당 이용하고, 생활용품은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것으로 사서 썼어요.”

-가족들은 장학금 기부에 흔쾌히 찬성했나요?
“내 돈 하는 건데 아이들(형제) 눈치 볼 필요 있나요?”

고 동문은 그동안 꾸준히 기부를 실천해 왔다.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무렵부터 연금을 모아 1억원을 고아원에 기부하기도 했다. 평소 여러 단체에도 기부 활동을 해왔다.

-기부 DNA는 누구한테 물려받으신 건지 궁금합니다.
“어머니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어요. 집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구멍가게를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한 아주머니에게 무상으로 주기도 하셨어요. 거지가 집 앞을 지나가면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 상을 차려주곤 하셨죠.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본받을 게 많은 분이셨습니다.”

-‘孤岩 늘푸른지도자양성재단’이 설립되면 어떻게 쓰이길 바라시나요?
“제가 보내드린 글에서 썼듯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모교 후배 중에 함석헌, 안병욱 선생 같은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또 서울대가 현재 세계대학 평가에서 30위권에 머물고 있는데, 하버드, 옥스퍼드와 견줄 수 있는 대학으로 성장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승무 사무총장(오른쪽)이 고광석 기부자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고광석 동문은 1959년 모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법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두 개의 학위를 갖고 있다. 미대생이 법대생이 된 특이한 케이스다.

-졸업 후 법학을 다시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회화를 공부할 때도 보통 서양화 위주로 했는데, 저는 동양화, 조소, 디자인까지 모두 관심 갖고 종합적으로 공부했어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미대 4학년 시절 합창단을 조직해 이화여대 총학생회와 연계해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예술을 어느 정도 했으니 학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서 법학과에 편입하게 됐죠. 두 명 뽑는데, 상대, 사대, 공대 등에서 34명이 왔어요. 미대생인 제가 선발됐죠.”

-10페이지 분량의 미니 회고록을 보니 조부로부터 천자문 등 한자 교육을 혹독하게 받으신 것 같던데, 그런 인문학적 소양이 법대 편입에 밑바탕이 된 거겠죠?
“그렇죠. 네 살 때부터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고 또래보다 세 살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요. 좋은 문방사우를 두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선비가 갖춰야 할 것들을 배웠죠. 늘 책을 가까이 하고, 마음이 허전할 때는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습니다. 여행만큼 좋은 공부가 없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거든요. 독서와 여행, 그 다음 명상을 생활화하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죠.”

-미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당시 장 발 학장님이 계실 때인데, 혈기왕성한 청년이라 그랬는지 부정한 일을 참지 못했어요. 학내 문제로 미학과 분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연히 문리대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대학 2학년 때는 문리대 김치호, 지리학과 변승지, 고려대 이만규·왕정증 등 학우와 송우회(솔벗 모임)를 결성해 4·19 혁명에 가담하기도 했지요.
그때 김치호 형이 총탄에 맞아 죽고, 저는 경무대 입구 효자동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 잡혀 마포형무소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김치호 형의 그날 아침 일기장에는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련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후손들에게 애국애족을 위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태어난 불세출의 영웅이었죠.”

-법대 시절엔 낙산문원이라는 문집을 만들기도 하셨던데.
“문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낙산문학회를 창립해 낙산문원(洛山文苑)을 창간, 두 번 발행했어요. 법대 친구들이 다들 조용해서 문집 만들기도 쉽지는 않았어요. 제가 졸업하고 나서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법대 졸업할 때 제가 주도해 앨범도 만들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앨범 제작이 제도화 돼 있지 않았거든요. 사진사 부르고, 디자인, 인쇄하는 분에게 제작 맡겨서 앨범을 만들었지요. 비용 마련한다고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회화를 전공했으니, 연하장 같은 것을 그려서 판매했지요.”

고 동문은 동숭동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젖는 듯했다.

“동숭동 시절이 참 좋았어요. 아침에 등교하면 좋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봄 여름 가을 철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요. 근처 쌍과부집에 가서 친구들과 막걸리 한 잔씩 하면 참 운치가 있었죠. 건너편 학림다방에서 50원짜리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고요.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네요.”

-법대를 졸업하고 법조인이 될 생각은 없으셨나요?
“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졸업 후 한일은행에 들어가 그곳에서 정년을 했죠. 법을 전공한 탓으로 주로 했던 일은 법률·세무 상담이었어요. 나중에 사례집도 펴냈죠.”

-아람기획은 어떤 회사인가요?
“대치동에 건물이 있어요. 관리하는 회사라고 보면 됩니다.”

-그림을 전공하셨으니, 그림 그리기가 취미실 것 같은데.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그렇죠.” 장민자 여사는 “이 양반이 음악도 하고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는데, 제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글 짓는 재주”라고 덧붙였다. 이력을 보니 2002년 강남서예문인화대전 초대 작가 선임, 2008년 대한민국 문인화대전 초대 작가 선임 외 여러 잡지에 다양한 글을 게재한 흔적이 뚜렷하다. 2015년에는 ‘세계 시·수필·명언집’도 편찬했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늘 인격을 도야하고, 미래지향적인 뜻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삶이 녹록지 않다 보니 자기 자신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큰 것 같은데, 이해는 합니다만, 좀 더 큰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면 합니다. 산 너머 저쪽엔 파랑새가 없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이 힘차게 뛰어줬으면 좋겠어요.”

김남주 기자



<2022년 3월 4일 베토벤의 ‘로망스’를 들으며, 고광석 동문이 쓴 시>



산들산들 봄 바람 나부끼니
온 들판이 파릇파릇 물드네.
소곤소곤 봄 비가 내리니
메마른 나무에 새 움이 돋네.

엄동설한 모진 추위 이겨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호시절
새 싹과 새 순이 곱게 움트고
모든 생명 무럭무럭 자라네.

가지 솟아나고 이파리 돋고
새 어린 줄기 기재개를 켜네
꽃송기가 동그마니 머금고
아롱다롱 꽃봉오리 맺히네.

오색 꽃잔치 어여삐 열리니
벌 나비 짝을 지어 날아오네.
재잘재잘 새 소리 들리고
청춘의 순정 정겹게 꽃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