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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2022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혼을 실어 매진하라”

이영덕  한솥 회장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혼을 실어 매진하라”
 
이영덕  한솥 회장

 

중견기업 회장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박한 사무실 벽에 “따끈한 도시락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라는 큰 붓글씨가 걸려 있었다. 홍보 슬로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영덕(법학69-73) 회장과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기업 경영을 통해 실제로 구현하려는 원칙이자 철학임을 알게 되었다. 

 이영덕 동문이 1993년 시작한 한솥 도시락은 가성비 최고의 도시락, ‘테이크 아웃’의 시초, 첫 한식 패스트푸드 체인 등의 수식어를 얻으며 국내 최대 도시락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 동문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닌 재일교포다. 1월 4일 서울 역삼동 한솥 본사에서 만난 이 동문은 “서울대는 내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 진정한 나의 모교”라고 했다. 

 이영덕 동문은 최근 본회에 10억원 장학금을 기부했다. 이 동문은 “어떤 전공이든 나와 같은 마음으로 외식업을 사랑하고 외식업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후배들을 응원하고 싶다”고 했다.
 
-부친께서 일본에 건너가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시나요. 
“전남 곡성 분이신데, 일제 때 생업을 위해 건너가셨지요. 일본 교토에 정착하셨고요. 어머님은 경상도 분이지만,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 익숙한 분이셨죠. 아버님은 일본 말도 서투르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박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교토 가장 번화한 곳에 살면서 레스토랑, 보석·시계 판매업을 하셨는데, 꽤 성공한 사업가셨어요. 우리 형제들도 공부를 잘해서 무시나 차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환경 속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일본 명문대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서울대에 입학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커 가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꿈이 외교관이기도 했고요. 일본에서 재일교포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잖아요. 한국 대학을 가자 해서, 교포 특례 제도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하게 됐죠. 당시 아버님이 한국에서 사업도 하셨고요.”

-외교관이 꿈이신데 왜 법대를 선택하셨나요.
“일본에서는 외교관이 되려면 법대 가는 게 정상 코스였어요. 입학하고 서울대에 외교학과가 있는 걸 알았습니다.”

-한국어가 서투셨을 텐데 대학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입학 전에 일 년간 한국어, 한국사 과정을 밟았어요. 점수가 좋아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집에서도 거의 일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국말이 익숙지 않았어요. 대학 와서도 강의를 듣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헤맬 때도 많았습니다.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 데모가 무척 많았어요. 휴교령을 내릴 때가 많았죠. 4년간 수업은 절반도 채 못했습니다. 사법시험 등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열심히 놀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을 참 좋아했어요. 고려대 다니는 친구, 이화여대 여학생과 혼성 트리오를 구성해 TBC 노래대회에서 3등을 했습니다. ‘오솔길’이라는 곡이었고 일본 대학가에서 부르던 노래를 편곡한 것이었죠. 그런데 어떤 가수가 그것을 자기가 불러도 되겠느냐고 요청하기에 흔쾌히 허락했어요. 은희가 다른 가사로 불렀던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였습니다. 이화여대 축제에 초대도 받고 그랬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대학 생활을 즐겁게 하셨네요.
“휴교령을 자주 내린 영향도 있지만, 제가 꿈이 외교관이지 않았습니까. 한 친구가 전직 대사 한 분을 소개해 줘서 만나게 됐는데, 이분이 절대 외교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가난한 나라의 외교관은 대우도 못 받고 힘들다고요. 그때 한국이 참 못살 때지요. 대사 포기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라고 하시더라고요. 꿈이 사라지니까 공부도 흥미를 잃었던 것 같아요.”

-졸업 후 여러 번의 사업 실패를 경험하셨다고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간단합니다. ‘사업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돈 될 만한 사업만 쫓아갔어요. 그러니까 재미없죠. 열심히는 하는데 혼이 안 실려요. 조금 어려운 일이 있거나 막히면 포기해 버리고. 15년 가까이 그랬어요.

일 년 정도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책도 보고 강연도 찾아 들으면서. 그때 이나모리 가즈오(교세라 창업주)의 강연을 무척 감명 깊게 듣고,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요. 왜 사업을 하는가, 일은 왜 하는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얻게 된 거지요. ‘사업은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일은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길’이란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사업에 대한 마음가짐을 확 바꾸게 됐죠. 무아지경으로 업무에 빠져 일하다 보니 사악한 생각이 사라지고 올바른 생각들로 가득 차는 체험도 하고요.”


총동창회에 10억원 장학금 기부
일본 교토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국내 최대 도시락 브랜드 일궈
“‘꽃반지 끼고’ 원곡은 제가 부른 노래”


-여러 사업 중 외식업을 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세요.
“외식업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렸습니다. 친구들이 너는 일본을 잘 아니까 무역업을 하거나 선진 기술을 도입해 제조업을 하면 될 텐데, 왜 그런 사업을 하느냐는 식의 반응이 많았어요. 음식점을 낮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요. 일본은 음식점을 몇 대 이어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로 여기는 분위기라 그런 반응이 낯설었습니다. 미식가 아버지 아래서, 또 교토라는 전통 도시에서 자란 영향으로 외식업을 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도시락 사업을 하게 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도시락 하면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싸주시는 음식이란 인식이 강했죠. 편의점 도시락도 저희보다 10년 정도 후에 생겼어요. 사실 처음엔 초밥, 우동 등도 고민했는데, 사업화 하기엔 한계가 보였어요. 점포 몇 개 여는 정도로 그치겠더라고요. 외식업을 하더라도 사업답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한국에 프랜차이즈 사업이 막 활기를 띨 때죠. 일본은 1970년대부터 패스트푸드인 맥도날드, KFC가 들어와 굉장히 잘되고 있었고요. 

우선 패스트푸드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템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도시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국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밖에서 사 먹는 분위기가 조성될 거란 생각이 들었죠. 일본에서 프랜차이즈 외식업이 발달해 있어서 열심히 관련 책도 보고 관계자도 만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재일교포가 하는 ‘혼케 카마도야’라는 도시락 프랜차이즈를 알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의 2대 도시락 업체 중 하나였죠. 본사를 찾아갔더니 임원 중 한 분이 서울대 법대 1년 선배예요. 그런 인연으로 도시락 프랜차이즈 노하우를 전수받아, 1993년 종로구청 앞에 한솥도시락 1호점을 열었죠.” 

한솥도시락 1호점은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970원 콩나물 덮밥부터 비싸야 2800원을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맛과 영양을 더해 히트를 쳤다. 테이크아웃 문화를 소비자들은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한식도 패스트푸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창조였다. 가맹점 입장에서도 쉽게 음식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시스템이 매뉴얼화 돼 있고, 조리할 공간만 있으면 되니 꽤 매력적이었다. 

-모든 성공 뒤에는 혁신이 있군요. 우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혁신을 할 수 있습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니까 관심의 깊이가 달라요. 계속 연구하게 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게 되고요. 일본 가서 책도 정말 많이 찾고, 현장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실행으로 옮기는 방법도 찾게 되고요.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경영철학을 말씀해 주신다면.
“사업을 시작할 때 내건 슬로건이 ‘따끈한 도시락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한다’였습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판단이 안 설 때 이 표어를 생각하면 바른길로 가고 원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맹점주에게 약속한 원가율 43~48%, 소비자에게 약속한 고품질의 저렴한 가격 이 두 가지 원칙을 지금도 고수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업에 성공하려면, 내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남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이타주의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란 직원들을 비롯해 고객, 지역사회, 국가, 지구로 확대되어 갑니다.” 


대담 : 오정환(공법83-87) MBC 부장·본지 논설위원


-그동안 우리나라 음식 문화가 변한다는 것을 체감하실 것 같습니다. 
“많이 느끼죠. 우선 쌀 소비량이 많이 줄었어요. 빵, 면 등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거죠.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이 1990년대 초반에는 80kg 정도였는데, 현재 절반 수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진출을 모색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중단됐죠. 잠잠해지면 싱가포르 등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음식 관련 스타트업 하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코칭, 카운슬링 등부터 필요에 따라 투자도 해주고요. 음식으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려는 후배들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요. 저에게 남겨진 사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동창회에 기부하신 장학금이 그런 학생들을 돕는 용도로 사용되면 좋겠네요.
“장학금 명칭을 ‘한솥 외식업 사랑 장학금’이라고 지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외식업에 도전하려는 우수한 후배들에게 쓰이면 좋겠습니다. 그런 후배들이 우리나라 외식업 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커요.” 

이 회장은 기부를 하게 된 데에는 서울대에 대한 고마움도 컸다고 했다. 

“제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오기 전까지, 전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인이었지요. 한국 와서 서울대를 다닌 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좋은 친구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우고, 좋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자부심도 생기고요.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죠. 그러나 친구나 인적 재산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재산이죠. 그런 재산을 서울대에서 얻은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고요. 수준 이상의 친구들을 만나 저도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좋은 친구를 만들어준 서울대학교가 고마워서 기부한 면이 크죠.”

-서울대 졸업식에 강연자로 서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합니다. 서울대 들어올 때는 성적에 맞춰서, 혹은 부모님의 바람으로 학과를 선택해 온 학생들이 많을 텐데, 졸업하고 나서는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혼을 실어 매진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독서를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입시공부는 별로 안 했습니다만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졸업 후에도 항상 관심이 있는 전문서나 비즈니스서 등 3~4권을 동시에 지속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서울대 입학 후 놀란 것 중 하나가 친구들이 입시공부 때문인지 독서를 많이 안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회 나가서도 독서를 많이 할 것을 강하게 권유 드립니다.”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