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호 2024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오미자로 빚은 고운달, 조니워커 블루·수정방 못잖아요”
이종기 (농화학75-81) 제이엘 오미나라 대표
동문을 찾아서
“오미자로 빚은 고운달, 조니워커 블루·수정방 못잖아요”
이종기 (농화학75-81) 제이엘 오미나라 대표
이종기 대표가 오미나라 대표 증류주인 고운달을 들고 서 있다. 고운달 병은 이경수(약학66-70) 코스맥스 회장이 술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작에 도움을 줬다.
윈저·골든블루 개발 경험살려 오미자 연구
우리 술에 국산 재료 10%만 써도 농업에 큰 도움
자금 없어 제품 개발하고도 홍보 못 해
체험공간 다녀간 분들 입소문 덕에 알려져
지난해 연말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2023년 농촌융복합산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이종기(농화학75-81) 동문이 운영하는 제이엘 오미나라가 대상을 수상했다. 2400여 개의 농촌융복합 인증 업체 중에서 받은 뜻깊은 상이다. 농촌융복합 산업은 1차 산업인 농업을 2차(제조·가공), 3차(농촌체험·관광) 산업과 융복합해 농촌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거나 높이는 산업으로 ‘6차 산업’이라 불린다. 와이너리 체험 등의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오미나라는 지역민 채용과 지역특산물 이용·수매에 이바지하는 지역 상생 업체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최고 양조전문가인 이 동문은 2008년 고향인 진천에서 멀지 않은 문경에 오미나라를 세워 지역 특산물인 오미자, 사과를 활용해 와인과 증류주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최초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결(結)’은 2022년 한미정상회담 공식 만찬 건배주로 선정됐고, ‘오미로제 연(緣)’은 ‘2022 대한민국 주류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증류주인 ‘고운달’(오미자)과 ‘문경 바람’(사과)은 술 마니아들 사이에서 해외 유명 위스키, 브랜디 등과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산 명주로 꼽힌다. 최근 ‘하이볼(증류주에 탄산수를 섞은 칵테일)’ 트렌드에 발맞춰 출시한 국내 첫 매실 증류주인 ‘섬진강 바람’은 광양 명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4월 11일 분홍빛 사과꽃이 만개한 문경에서 이종기 동문을 만나 세계 명주를 향한 그의 못다 한 꿈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입구엔 ‘향기 그윽한 천년 주막 세계 명주가 익어가고 있네’란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는 “이곳은 과거 사람들이 문경새재를 넘나들 때 쉼을 청하던 주막이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오미나라의 제품들. 왼쪽부터 고운달, 문경 바람(오크, 백자), 오미로제 연, 결. 이승진(공법83-87) 동문이 오미나라 제품 판매를 돕고 있다.
-오미나라를 설립한 지 16년이 흘렀습니다. 지난해 50억 매출을 올렸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지요.
“와이너리 설립하고 10년간은 한 푼도 못 가져갔으니까요. 2021년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내년에는 배당도 하려고요.”
-서서히 오미나라 술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윈저(위스키)를 개발했을 때 마케팅 비용으로만 500억원 이상을 썼습니다. 그래도 1년 후 인지도를 조사하면 ‘알고 있다’는 답변이 4~5%밖에 안 나옵니다. 오미로제, 문경바람, 고운달의 경우 광고를 할 수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택했던 전략이 오미나라 체험공간을 다녀간 관광객을 통한 입소문과 제가 열심히 언론 인터뷰 등으로 홍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SNS 등이 활성화되고, ‘혼술’ 문화가 생기면서 판매량이 많이 늘었어요. 맛과 품질에는 자신 있었기 때문에, 버티다 보면 알아주리라 믿었습니다.”
-최근 광양 매실로 만든 증류주 ‘섬진강 바람’이 지역 축제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고 들었습니다.
“‘섬진강 바람’은 하이볼 트렌드에 맞춰 기획한 술입니다. 광양시에서 먼저 제안이 왔고요. 매실주의 경우 중국, 일본,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데 별도의 절차를 밟지 않아도 돼서 판매 다변화 전략 차원에서도 좋은 아이템이었습니다. 시중에 매실주가 많잖아요? 그 제품들은 모두 침출주입니다. 소주나 주정에 매실을 넣어 만든 술이죠. 돌배를 섞은 매실을 증류주로 한 것은 저희가 아마 처음일 겁니다. 광양을 비롯해 여수, 순천 등 남도의 식문화에 어울리는 대표 토착 술로 만들 계획입니다.”
-오미자 브랜디 ‘고운달’,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결’을 극찬하는 유튜버들이 많습니다. 다만 비싼 가격이 흠인데.
“오미자 원료 가격이 워낙 비쌉니다. 제조 과정이 길다 보니 수율도 낮고, 손실도 많아요. 또 하나는 명주에 걸맞은 가격이 있다고 봅니다. 고운달의 경우 조니워커 블루, 수정방 등과 비교해 손색없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명주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이 동문의 한국 전통 명주에 대한 꿈은 1990년 스코틀랜드 헤리엇와트대에서 양조학을 공부할 때 생겼다. 당시 정원 35명 가운데, 22명이 외국 학생이었는데, 자국의 술을 가져와 품평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동문은 인삼주를 가져갔다. 당시 지도 교수가 “이게 술인가? 약인가?” 혹평을 했다. 부끄러웠고, ‘언젠가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술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쌀, 보리 등 많은 재료가 있는데 오미자를 택한 이유가 뭐였나요?
“우리나라엔 양조용 쌀, 보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일반 쌀로도 술은 만들 수 있으나, 양조용으로 빚은 술과는 맛이 다릅니다. 오미자는 우리나라 특산물이고, 이름 그대로 다섯 가지 맛을 갖는, 우리 술로는 최고의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색깔도 얼마나 이쁩니까? 달콤한 꽃향기도 나고요. 문경이 국내 오미자 생산의 40%를 생산하는 곳이라 여기로 자리를 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효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오미자의 쓴맛, 신맛, 짠맛이 모두 방부 성분이에요. 발효가 더딜 수밖에 없죠. 프랑스 양조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해결책을 못 찾아 제가 수개월을 연구해 방법을 찾아냈죠.”
-국내 최고의 양조 전문가로 꼽히는데, 술 제조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세계적인 주류회사인 씨그램, 디아지오코리아에 있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당시 발렌타인, 시바스리갈, 로얄 살루트, 조니 워커 등의 품질 관리를 제가 했으니까요. 일류 양조자들과 교류할 기회도 많았고, 헤리엇와트 대학에서의 공부도 큰 자산이 됐습니다. 후배인 문성훈(식품공학86-92) 부사장, 이중제(농화학84-91) 연구소장의 역할도 크고요.”
-술을 만들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뭡니까?
“맛, 향, 색깔, 여운 모두 중요하지요. 저만의 특색이라면, 목 넘김을 부드럽게 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증류주 고운달, 문경 바람 등은 몇 년산 등의 연식이 없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전통적인 위스키의 경우 연식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만의 카발란이 등장하면서 연식의 의미는 많이 약해졌습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수정방, 마오타이 등도 연식이 없습니다. 숙성의 기술이 좋아지고 있고, 잘 만든다면 연식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술 애호가인 이 동문은 ‘술 한 잔 하면서 시를 읊던’ 옛 술 문화 복원에도 관심이 많다. 2년 전 문을 닫긴 했지만, 건전한 술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이 동문은 세계술박물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우리에겐 폭음 문화가 있었죠. 1983년도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까지 12시면 들어가야 하니까, 야근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폭음하게 된 겁니다. 빨리 취하고 싶으니까. 그 문화가 오래 갔죠. 술은 만드는 데 굉장한 정성이 들어갑니다. 함부로 마시면 안 되지요.
과거 일제 강점기 때 문화 말살 정책으로 우리 고유의 가양주 문화가 사라지고 희석식 소주 일변도의 문화가 된 게 안타깝습니다. 국내서 시판되는 술 대부분은 수입 원료로 만듭니다. 우리가 마시는 술의 10%만이라도 우리 농산물로 만들면 농업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과수 농가는 특히 어려워요. 양조산업은 농업을 키우고 지역 인재를 육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혼술’ 문화도 문제라고 했다. 술은 교류하며 문화와 예법을 논하는 것인데, 그런 본연의 성격이 사라지고 일종의 도피제로 바뀐 것은 우려할 사항이라고 했다.
인터뷰 하는 공간에는 기념 문구와 이름을 새긴 도자기와 오크통이 빼곡했다. 물어보니 오미나라 투어 참가자나 직원 지인들이 자기만의 기념술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저 술들은 손님들이 오크통이나 항아리를 사고 직접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오미자 증류주가 담긴 고객들의 기념술.
-올해 칠순이기도 하세요. 남은 과제는.
“세계 명주가 되려면 일단 많이 팔려야죠. 그래서 수출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뉴욕에 판매회사를 설립했어요. 미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라벨도 리뉴얼 했고요. 현재 FDA 승인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연말에는 본격적으로 수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판매될 때 명주 반열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바람이라면 양조산업이 발전해서 희석식 소주, 맥주 문화가 다양화 됐으면 합니다. 지역 특산물로 만든 좋은 품질의 술들이 많이 나와야죠. 저를 우리 술 독립군 대장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술 독립 운동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농산물로 좋은 술을 만들어 세계적인 술들과 경쟁해 승리하자는 것이죠.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술.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그 문화를 되살리자. 우리 농가의 소득을 올리고, 관광산업, 건전한 음주문화에도 기여하는 우리술 독립군 대장으로서 힘차게 달려야죠.”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