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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021년 10월] 기고 에세이

세종의 마음을 되새기며

김완진 모교 명예교수
 
세종의 마음을 되새기며

김완진
경제72-76 
모교 명예교수


작년 한글날 아침 한글학회 회장을 맡은 언어학과 권재일 교수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살펴보니 권 교수가 중학 시절 쓴 일기 중에서 한글날 소감을 적은 글이었다. 역시 권 교수답게 소싯적 일기까지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다른 한글 사랑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만난 자리에서 한글이 화제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에 관해서는 우리 국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권 교수로부터 한글에 관해 필자가 모르고 있었던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듣게 되었다.

우선 지금까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한글이 세종의 독자적인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세종은 독자적인 비밀 프로젝트로 추진해 왔고 창제 후 1443년 처음 신하들에게 발표했다고 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해도 혼자 힘으로 한글 28자를 완성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 이후 세조 때까지는 삼강행실도 등 약간의 서적이 한글로 간행되었으나 1504년 이후에는 한글의 공식적인 사용이 금지되었고, 궁중 여인들이나 승려, 양반집 부녀자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가끔 통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구한말 1894년 갑오경장에 이르러 비로소 공식문서에 한글사용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글이 조선의 지배층에서 얼마나 철저히 배척되어 왔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글의 창제원리에 대해 온갖 추측만이 난무하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한글이 당대최고 수준의 음성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체계적으로 창제된 것임이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은 잘 알고 있는 자음과 모음의 제자원리가 1940년에야 비로소 알려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개화기 한글의 보급에 개신교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도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었고, 그 과정에서 사전의 편찬, 문법체계의 확립, 표준말의 정립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한글의 보급과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권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세종이 어떤 마음으로 한글을 창제했을까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말과 글이 달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한문을 버리고 다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문명세계인 유교문화권을 떠나 오랑캐 나라가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대국인 중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적으로 극히 위험한 발상임을 세종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실록에 기록된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더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500여 년이 지난 지금, 더욱 그 빛을 발하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혜안과 함께 백성의 처지에 공감하는 그 마음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