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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021년 10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어렵게 사는 동문 가족 찾아 돕겠다”

류  진  풍산 회장 인터뷰
“어렵게 사는 동문 가족 찾아 돕겠다”
 
류  진  풍산 회장



총동창회 사회공헌위 공동위원장 맡아
시드 머니로 1억원 기부 약정
 
부시, 바이든, 콜린 파월 등과 친분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 능통


박찬호가 홈런을 쳤던 야구 배트, 2015년 국가대항 남성 골프대회인 ‘프레지던츠 컵’을 한국에 유치한 공로로 받은 우승 기념컵과 당시 인터내셔널 선수들이 하나씩 제공해 한 세트로 만든 골프채, 고 김대중 대통령이 쓴 휘호 ‘敬天愛人’, 여러 단체들로부터 받은 표창장, 공로상들. 사진을 함께 찍은 인물들은 열거하자면 입 아플 정도다. 타이거 우즈, 레이건 전 미 대통령, 부시 전 미 대통령 부자, 오바마 전 미 대통령, 캐롤라인 케네디 여사,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부장관, 콜린 파월 전 미 국무부 장관, 고 노무현 대통령 내외, 야구선수 박찬호….

약 132㎡(옛 40평) 크기의 널찍한 접견실 벽면을 가득 채운 건 그가 ‘글로벌 마당발’임을 증빙하는 발자취였다.

류진(영문78-83) 풍산그룹 회장은 한국인 중 국내외 정재계 인맥이 가장 넓기로 유명하고, 또 언론에 인터뷰를 잘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그런 류 회장이 지난 7월 서울대총동창회 사회공헌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기념으로 인터뷰에 나섰다.
 
부시 전 대통령 류 동문 초상화 선물
류 회장은 역대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미국 갈 때 가장 같이 가고 싶은 기업인 중 한 명이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길에도 동행한 건 아닌지 물었더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이든 대통령과는 큰 친분이 없는 건가 물었더니 역시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아내가 미국 필라델피아 헌법박물관의 사외이사를 20년간 했어요. 마지막 회장이 바이든 당시 부통령이었어요. 그 인연으로 바이든 대통령과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죠.”

류 회장의 아내는 모교 법대를 졸업한 고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둘째 딸 노혜경씨다. 류 회장 글로벌 인맥의 핵심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인데, 노 전 총리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으로 인연을 더욱 깊게 맺게 됐다고 했다.

“장인어른께서 외무장관에다 총리까지 하셨으니 여러 사람들을 많이 소개해주셨어요. 그중에서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저를 아들처럼 대해줬어요. 친해지니 그 가족들도 저를 형제처럼 대해주고.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마찬가진 게 한 다리 건너면 모두 다 알게 돼요. 부시 가족을 통해 여러 정재계 인사들을 알게 됐어요.”

아들 부시 전 대통령은 2019년 고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 행사에 초대받아 왔을 때 노 대통령의 초상화와 함께 류 회장의 초상화를 그려서 들고 왔다. 퇴임 후 미술에 심취한 부시 전 대통령이 주는 마음의 선물이었다. 특히 바버라 여사는 1992년 풍산의 아이오와 공장 준공식에 참가해 테이프 커팅을 했다. 이후에 류 회장을 만날 때마다 “아이오와의 내 공장 잘 돌아가?”라고 묻곤 했다는 게 류 회장의 말이다. 2018년 바버라 여사가 숨지기 한 달 전에도 류 회장이 직접 찾아가 만났다고 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1시간 동안 언급된 지인만 파월 전 장관, 전 미식축구선수 하인스 워드, 색소폰 마술사 케니지, 피아니스트 조성진, 양희은, 김세환, 알리, 부활 출신 정동하, 거미까지, 정재계를 넘어 문화계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사람을 소개받는다고 모두 다 인맥이라고 부를 만한 친분을 쌓는 건 아니다. 류 회장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을 터. “제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농담을 좋아하거든요. 그냥 계속 연락하다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자연스레 대화하는 거죠. 외국 사람들은 저의 이런 모습을 좋게 보는 것 같아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글로벌 농담 따먹기’가 어디 쉬운가. 류 회장의 비법은 언어 능력에 기반한 것이었다. 류 회장은 일본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제학교를 다녔다. 영어와 일본어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체화됐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일본에서 재기를 꿈꿨던 게 류 회장에겐 기회가 됐던 셈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까지 자발적으로 배웠다. 프랑스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다. 회화를 자연스레 하기 위해 요즘도 시간나면 계속 공부한다고 한다. 극심한 노력파이거나 언어 천재이거나.

“프랑스어는 굉장히 로맨틱해서 배우면 활용할 곳이 많아요. 지금도 잘 배웠다고 생각하는 언어에요. 문화적으로도 좋고 대화도 되니까.”

류 회장은 2019년까지만 해도 2주일에 한 번 미국을 다녀왔는데 요즘은 한 달 반은 한국에, 한 달 반은 미국에 있는 식으로 생활한다(이 인터뷰를 한 바로 다음 날이 마침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사업과 미국에 거주하는 가족을 챙기기 위해서다.

美·獨·日 등 여전히 동전 사용 많아  풍산그룹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업은 동전의 원재료인 소전사업과 총알 제조 사업이다. 신용카드가 활성화될수록 소전 사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물으니 ‘코로나 수혜 사업’이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장기적으론 1년에 5% 정도 소전 사업이 줄고 있지만 코로나 이후 공장이 풀가동되고 있어요. 셧다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동전이 부족해서 코인 빨래를 못하고 있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리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코로나로 셧다운 되다 보니 미국의 동네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이 대형 마트로만 몰리다 보니 동전 유통이 확 줄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작 동전이 필요한 일상생활 곳곳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어딘가 잠겨 있는 동전을 대신해 동전을 더 찍어내 달라는 요구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신용카드만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게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여전히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소전 사업 비중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그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반도체에 들어가는 소재다. 자동차 배터리, 휴대전화, TV 등에 들어가는 필수 동 소재를 풍산이 공급하고 있기에 첨단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다고 했다.

“중요한 건 영업이익이죠. 그래서 사업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영업이익을 늘리는 걸 계속 신경 쓰고 있어요.”  

얼마 전 끝난 2020 도쿄올림픽 기념주화도 풍산의 미국공장이 공급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일본 이야기가 나오자 한일 관계에 대한 걱정도 했다.

“지금 미국은 한일 관계에 대해 걱정이 많죠. 우리가 일본과 관계가 계속 멀어지면 오히려 미국이 일본 쪽에 완전히 쏠릴 수 있을 것으로 봐요. 또 중국 쪽으로 너무 쏠리면 그것 또한 못마땅하게 생각할 테니까…. 내년에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아무래도 외교적으로 일본, 중국 관계를 잘 관리해야 될 겁니다.”

기업인 입장에서 정치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내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도 신경이 쓰일 법하다.

“기업 입장에서라기보다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국민을 단결시키는 분이 나와야죠. 지금은 진보다 보수다 쪼개져 있잖아요. 한쪽에 치우친 누군가의 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기업을 규제하는 정책이 지속되면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기를 꺼리게 되니 정부가 알아서 바꿀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했다. 정부와 기업이 파트너가 돼 같이 뛰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대체로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잘 쓰는 것을 중시한다. 류 회장도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해왔다. 2007년부터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지원하는 한국펄벅재단 이사장을 맡아 이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돕고 있다. 경북 안동의 시골 고등학교였던 풍산고등학교의 이사장(얼마 전에 물러남)을 맡아 2002년 자율학교로 전환하여 대한민국 상위권 명문고로 성장시켰으며, 이 학교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번에 이희범 총동창회장이 제안하자 활동을 위한 자금 1억원을 내며 총동창회 사회공헌위원회 공동위원장도 선뜻 맡았다.

기업이 아닌 서울대 총동창회가 하는 사회공헌 활동은 어떤 형태로 표현될까.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다 잘살거나 성공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병에 걸려 활동도 못 하고 꿈을 접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거든요. 동문을 위주로 한 사회복지 활동을 해보자는 거지요.”
 여기다 교육의 기회를 공평히 부여받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현역 학생 후배들을 매칭해 공부를 가르쳐주게 하는 활동도 구상하고 있다. 후배들은 용돈을 벌고, 학생들은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 밖에 사회와 서울대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발굴하는 중이다.

“나만의 특별한 장기 하나는 있어야”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동문이라면 누구나 류 회장처럼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동문 학생들에게 해줄 조언을 부탁했다. “나만의 특별한 뭔가가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사실 한국 사람은 서울대 나오나 다른 대학을 나오나 스펙이 똑같지 않습니까. 뭔가 좀 달라야 돼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 3개 언어를 배웠거든요. 시간을 조금만 쪼개면 어렵지 않아요. 유럽 가면 학생들이 대부분 5개국어 정도 해요.”

물론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유럽 언어는 그리스-라틴어가 베이스인 경우가 많으므로 배우기 쉬울 수 있다. “우리는 한자 문화권이잖아요. 일본어, 중국어 정도는 배울 수 있죠. 제가 경영자로서 사람을 뽑을 때는 ‘아, 이 사람은 좀 다르구나. 굉장히 넓구나’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언어 능력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요즘처럼 코로나 시국이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때 나만의 취미활동을 발굴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저는 얼마 전에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맨날 골프만 칠 수 없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배우기 시작한 건데요. 유튜브에 영상도 많고 요즘은 학습 환경이 뛰어나잖아요. 어릴 때 기본은 조금 배웠지만 30년간 하나도 안 하다가 요새 시간이 많이 남으니 연습을 많이 했죠. 지금은 집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피아노 치는 시간이 유독 좋더라고요.”

실제로 부시 전 대통령도 퇴임 뒤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로 뭐가 좋을까 고민할 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그림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미술로 마음을 먹었다는 게 류 회장의 설명이다.

“우리 서울대인들은 사회에, 학교에 빚이 있잖아요. 사회에 나가면 갚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죠. 친구들 많이 사귀고, 남한테 베풀고. 이렇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글·대담 : 하임숙 (영문91-95) 채널A 보도제작에디터 


류 동문은
△1958년 출생(고향 경북 안동, 서애 류성룡 선생 13대손) △일본 아메리칸 하이스쿨, 모교 영문학과 졸 △1982년 풍산금속 입사, 2000년 풍산 대표이사 회장 △제8차 AEBF(Asia Europe Business Forum) 총회 의장, BIAC(The Business and Industry Advisory Committee to the OECD) 회장, IWCC(International Wrought Copper Council) 회장, 프레지던츠컵 조직위원장, 한국비철금속협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한국방위산업진흥회 부회장 등 역임 △현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서울국제포럼 부회장, 한국메세나협회 부회장,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이사회 이사, The First Tee(미국 골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