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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2021년 9월] 뉴스 기획

“공부 잘해서 주는 돈 아닙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돼 달라는 거지요”

정팔도 동문과 장학생의 만남
 
 
“공부 잘해서 주는 돈 아닙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돼 달라는 거지요”
 
정팔도·이자행 특지장학회


정팔도·이자행 특지장학회는 모교와 연계해 새싹멘토링을 운영, 2011년부터 10년 동안 서울대 33명을 포함해 대학생 365명을 배출했다. 정팔도 동문과 부인 이자행 여사, 특지장학생 4명을 9월 3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정 동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연세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박주웅 동문, 모교 3학년 박수영씨, 이자행 여사, 정팔도 동문, 모교 1학년 이건무, 2학년 장승혁씨.


출신고 후배돕는 새싹멘토링 운영
모교 33명포함 대학생 365명 배출
 
멘토 역할, 대학 생활에 지장 없어
선순환 일원이 되어 누리는 영광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이 어떤 일을 하고 나서면 아내가 이를 도와 서로 협동하고 화합한다는 뜻이다.

1971년 홍인고무전장공업사를 설립한 정팔도(AIP 1기·AMP 26기 본회 상임부회장) 코리아랜드캄파니 회장은 1982년 석탑산업훈장, 1989년 1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한 명실공히 대한민국 수출 역군이다. 법무부 범죄예방자원봉사위원 안양만안지구협의회장, 전국지체장애인협회 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사회 봉사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빛나는 영광을 증명하듯 그의 사무실 한쪽 벽면엔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 기념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부인 이자행 여사는 중고등학생 땐 청소년적십자 활동, 대학 재학 시절엔 농촌 계몽운동을 펼쳤다. 극동지역 해외유학생 대상 토플시험 기관인 AFK한미재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재직하는 동안, 미국의 원조를 끌어와 가난한 농가에 주택이나 양계장을 지어주는 업무를 병행했다. 고등학교 후배가 서울대에 합격했을 땐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봉사활동으로 이름을 날려 정팔도 동문이 이에 반해 청혼했다고.

정 동문이 본회 장학빌딩 건립기금으로 쾌척한 10억원 중 절반은 이 여사가 그에게 건넨 퇴직금이다. 이쯤 되면 부창부수(婦唱夫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정팔도·이자행 특지장학회는 2000년 1학기부터 2021년 2학기 현재까지 총 297명의 장학생에게 약 7억9600여 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장학생 전원이 ‘새싹멘토링’에 참여, 본인 출신 고등학교 후배의 멘토로서 학업과 진학을 돕는다. 특지장학생 박주웅(정치외교15-20 연세대 로스쿨 재학) 동문과 모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수영(재료공학19입), 2학년 장승혁(기계공학20입), 1학년 이건무(기계공학21입) 씨와 함께 정팔도 이자행 부부를 지난 9월 3일 서울 서초동 홍인빌딩에서 만났다.


-정팔도·이자행 특지장학회는 새싹멘토링을 특징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정팔도) “우리 장학생들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또는 단순히 서울대 학생이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았다거나 혹은 돈 있는 사람이 자기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장학 기금을 내놨을 거란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돼줬으면 해요.
그런 소망을 담아 일찍부터 사회봉사에 관심을 심어주고자 서울대 새싹멘토링 사업과 연계시켰습니다. 자기 출신고교생 5~10명을 정해 1회 3시간 주 2회 학습지도를 하는 것이죠.
코로나 이전엔 저희 사무실이나 출신고교 강의실에서 입시 관련 특강을 진행했고, 코로나 이후엔 카톡이나 줌을 적극 활용해 멘토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화를 통한 개별상담은 코로나와 상관없이 활발하고요.
2011년부터 10년 동안 서울대 학생 33명을 비롯해 총 365명의 대학 합격생을 배출해냈습니다. 제가 알기론 이런 멘토링을 운영하는 장학회가 몇 없어요.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장학금은 열심히 공부하라고 주는 돈 아닌가요? 시간을 할애해 멘티들 학습지도를 하려면 제아무리 서울대 학생이라도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박주웅) “학업 성취라는 게 단순히 공부에 쓰는 시간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외려 멘토로서 후배들에게 더 멋있고 떳떳한 선배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어요. 대학 생활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 참여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큰 부담이 될 만큼 힘들진 않습니다.”

(박수영) “2019년 서울대 입학 직후부터 양명여고 후배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제 출신 지역인 안양에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점이 무척 뿌듯하고요. 장학금 나아가 더 큰 맥락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받고 또 주는 선순환의 과정에 일원으로서 속해 있다는 게 영광스럽습니다.”

(이건무) “저는 올해 입학해서 아직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공부의 끝은 사회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좀 막연하고 따로 시간이나 비용을 들이기에도 부담스러웠는데 정팔도·이자행 특지장학회 사업의 일환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사회봉사도 할 수 있게 돼 기대가 큽니다.선순환을 염두에 두긴 하나 생면부지인 저에게 대가 없이 이렇게 큰돈을 주신 거잖아요. 감사하다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드는 게 사실인데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죄송스러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멘토링 활동 또는 기억에 남는 멘토나 멘티가 있다면 한 말씀.

(박주웅) “저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자 서울대 재료공학부 14학번 선배한테서 멘토링을 받았고, 모교에 입학한 2015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쭉 멘토로서 프로그램에 참여해왔습니다. 해마다 서울대 후배들을 배출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울대에 합격할 때까지 쭉 멘토링을 해줬던 똘똘한 후배 한 명이 기억에 남아요. 저를 보고는 정치외교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제가 4학년이 됐을 때 1학년에 입학했죠. 다른 후배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과가 갈리면 교류를 계속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 후배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종종 만납니다.”

(장승혁) “저도 같은 고등학교 선배이자 서울대 선배한테서 멘토링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의욕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고, 후배들에게 그런 기운과 응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 실감했어요. 연말이나 연초, 해이해지기 쉬울 때 학교 강당에 불러 모아 입시 상담이나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 등을 가르쳐줬습니다.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모임 인원이 제한적이라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링하고 있어요.”

(이건무) “같은 장학금을 받았던 18학번 기계공학부 선배가 멘토링 해주셨는데 지금 군 복무 중이세요.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방역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인터뷰 내내 마스크를 쓴 채 발언을 이어갔다.


새싹멘토링 활동 보고서와 소감문.


-장학생들끼리 이렇게 끈끈한 유대를 이어가고 있는데, 회장님 입장에선 장학생들이 다같이 모여 있을 때 더 보기 좋지 않을까요. 본회 장학금 수여식이 수년째 못 열리고 있는데 아쉬움은 없는지.

(정팔도) “멘토와 멘티가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게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누가 내 장학생들인지 직접 보고 인사 나누면 물론 반갑죠. 그러나 형식보다 내용에, 본래의 취지에 충실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멘토링 프로그램과 관련된 학생들 의견엔 늘 귀기울이고 있어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과 공부 끝나고 밤늦게 귀가할 때 안전한 교통편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자주 들리죠. 불편한 점이 개선될 수 있도록 학교와 협력해 나갈 방침입니다.”

(이자행) “긴 시간 장학 사업을 해왔고 장학금 수여식에도 꾸준히 참석했지만, 장학생들을 사석에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무척 반갑습니다. 지난해 고등학교 후배 2명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어요.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지급할 생각이고요. 하지만 그 학생들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저희에게 보답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다음 또 다음 후배를 위해 힘 써주길 바랍니다.”


-이자행 여사님은 14년간 일하고 받은 퇴직금을 정팔도 동문님께 본회 장학빌딩 건립기금으로 건네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정팔도) “총동창회 임광수 고문님이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분의 열정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기부자를 모으기 위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셨어요. 장학빌딩을 지어 임대수익으로 서울대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자, 건축비용은 기금을 모아 충당하자, 웅변하셨죠.
그때 가진 돈이 그것뿐이라 그만큼 냈어요. 더 있었으면 더 냈을 겁니다.사업을 정리하고 잠시 쉴 때라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아내가 넌지시 퇴직금 전액을 건네더군요. 당시는 IMF 경제위기 상황이라 얼마나 큰돈인지 실감은 잘 안 났지만, 짓고 보니까 참 성공적으로 잘 됐어요. 임광수 전 회장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2006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선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힘들다고 하셨는데, 본회 장학 사업은 물론 각종 행사에도 꾸준히 후원금을 보내주고 계세요.

(이자행) “제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옆에서 지켜본 인간 정팔도를 봤을 때 본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아주 인심이 후해요. 뭔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일엔 굉장히 박하고요. 그래서 회사 운영할 때도 가정과 직장에 충실한 직원은 그의 부모나 자녀들까지 다 보살펴줘요. 자기 가족처럼요. 골프대회, 바둑대회 같은 행사할 때 찬조금 내는 것 정도는 공공연하게 할 수 있는, 대단치 않은 일로 여기고 그냥 했을 거예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바가지는 절대 안 긁었습니다(웃음). 항상 응원했어요. 잘했다고 하니까 기가 살아서 더 잘 해냈을지도 몰라요. 여자 입장이 참 약한 것 같지만, 여자의 말 한 마디가 남자의 앞길을 좌우하기도 해요. 굉장히 중요하죠.”

-무기한 무담보 무이자로 월급을 선지급해 직원들 주택마련을 지원하셨고, 안양교도소 모범재소자들에게 자활의 기회를 주기도 하셨습니다. 사회공헌 또는 봉사에 대한 소신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팔도) “부산 말로 봉사란 장님을 보고 봉사라고 해요(웃음). 봉사는 장님이 하는 겁니다. 눈 뜨고는 봉사가 잘 안 돼요. 봉사가 돼야 봉사를 합니다.”

(이자행) “봉사를 하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내가 뭐가 됐을 때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대학교 때는 물론 중고등학교 때도 작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경제적으로는 못 하더라도 머리에 있는 지식으로 봉사할 수도 있죠. 우리 장학생들처럼요.
취직 후에 돈 벌어서, 결혼하고 내 집 마련한 다음에…, 이런 식으로 미뤄선 하기 어려워요.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가진 게 뭐지, 할 수 있는 게 뭐지, 돌아보고 실천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