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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2021년 8월] 문화 나의 취미

“검은색 하나에도 수백가지 갈래가 있더군요”

수묵화 그리는 정순원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검은색 하나에도 수백가지 갈래가 있더군요”

수묵화 그리는 정순원 (정치71-75)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문인화로 국전 등 대회 수상
“팔순잔치 대신 전시회가 꿈”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을 쳐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달랐어요. 매일 내가 그린 걸 쳐다봅니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렸어’ 스스로 야단도 치고요.”

누구나 인정하는 경제학자이자 경영인의 고백으론 다소 의외였다. 화자는 정순원(정치71-75)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받고 현대경제연구원 부사장, 현대차 사장, 현대로템 부회장, 현대위아 부회장, 삼천리 대표 등을 거쳤다. 세계 시장 개척을 위해 지구 다섯 바퀴나 돌았다.

그런 그가 수묵화에 푹 빠졌다. 모든 직을 내려놓고 옛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붓 잡기에 몰두한 지 3년째. 최근 국전(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에서는 오체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마스크를 뚫고 묵향(墨香)이 진동하는 답십리 구지화실에서 그를 만났다. 깨끗한 화선지와 벼루, 붓과 먹이 놓인 책상에 마주 앉아 이따금 먹선을 그으며, 그 먹물이 마르는 것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처음엔 ‘정신 수양’ 차원에서 시작했습니다. 구에서 운영하는 ‘아버지 교실’에서 수묵담채화를 시작했고, 구암 황영배 선생님을 만나 이곳 화실에서 문인화를 그립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렸을까, 생각하면 시공간을 뛰어넘는 기분이 들어요.”

일주일에 두 번 화실에 나온다는데 3년 동안 쓴 먹이 시나브로 닳아 반 토막이 돼 있었다. ‘열심히 그린 시간이 보인다’고 하자 쑥스러운 듯 웃었다. “수묵화에서 제일 중요한 건 먹 가는 겁니다. 검은색 하나를 가지고 수백가지 색을 내려면 먹이 잘 갈려져 있어야 해요. 아주 옅은 색부터 진한 색까지, 다양하게 나온 그림이 살아있는 그림입니다.”

그가 ‘어젯밤 그린 것’이라며 그림 한 점을 펼쳤다. 분홍 꽃봉오리와 연꽃 아래 연잎이 싱싱한 먹빛을 듬뿍 머금었고 시들어 가는 연잎은 먹기운을 거의 뺀 붓질로 표현했다. 연꽃의 일생을 한 화면에 담은, 완전한 관념의 세계다. “중요한 것은 심미안, 내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문인화에 시제(詩題)를 붙이는 것”이라 했다.

그림의 빈 공간에 시제를 적으려면 고전 공부가 필수. 옛 문집을 파고들어 그림에 알맞은 시를 찾고, 직접 시를 쓰기도 한다. 깨알 같은 붓글씨로 마음에 둔 시구들을 적어둔 화선지 꾸러미를 꺼내왔다. 일종의 작가노트다.

꾸러미를 뒤적이던 손이 변계량의 시 ‘신흥유감(晨興有感)’에서 멈췄다. ‘조년유학야유유(早年遊學也悠悠) / 지향명도주불휴(只向名途走不休)…’. ‘젊어서 유학하던 일 아득한데 명예의 길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네…’로 시작하는 시다. 은퇴 후 충분히 다른 자리에서 경륜을 펼칠 수도 있었을 터, 그 시간을 그림과 바꿔 무엇을 얻었을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제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태워 없애는 과정이에요. 내면의 감성적인 메시지를 끌어내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쓸데없고 불편한 욕망들을 태워 없애는 거죠.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주말엔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 보면, 나중에 혹시 예전에 있던 세계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봉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지문(知門)’이라는 호도 생겼다. 스승 구암 선생이 지어줬다. “앎의 문을 통과한 것 같은지” 묻자 “이제 배워서 들어가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과거에 살아온 세계가 이성의 세계라면, 이젠 완전한 감성의 세계죠. 4차원 세계에서 3차원 세계를 쳐다보는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감성을 채우면 채울수록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돼요.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게 듣게 됐고요. 수묵화를 시작하고 가장 좋은 점입니다.”



국전 입선작인 정 동문의 ‘매화’.


예술의 세계에는 1등도, 끝도 없어 길을 잃기 쉽다. 마음의 세계를 화폭에 녹여내는 것은 테크닉과 별개. 한계를 느껴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렇게 사군자를 많이 그려도 난잎 하나 치기가 어렵다고 고수들은 말한다.

“이 길이 그렇게 쉬운 길은 아닙니다. 많은 유혹이 있죠. 골프 치자, 등산 가자, 그런 것 다 뿌리치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림에 재능이 없어 먹 가는 법부터 색깔 내기, 선 긋기, 구도 잡기, 하나하나 다 배웠습니다. 똑같은 걸 스무 장은 그려야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건져요.

학교 졸업하고 출세만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면 정서가 메말라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누군가, 뭘 하며 살아왔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 취미가 자신을 찾는 데 굉장한 도움을 줘요. 특히 서울대인은 인간다운 냄새를 풍기는 지성인이 되어야죠. 어떤 취미가 더 좋다, 낫다를 떠나 이성에 치우친 삶이 되지 않도록 감성적인 경험을 해보길 바랍니다.”


인터뷰 말미, 국전에서 입선한 그의 작품을 봤다. 곧게 뻗은 줄기 끝에 붉고 선연한 매화꽃. 똑같은 매화에, 구도도 비슷한데 나중에 그린 그림은 나무 줄기를 과감하게 굽혀 놓았다. “자신감이 생긴 거죠”. 그가 미소지었다. 입선 후 전시회 권유도 더러 받았다. 그러나 10년은 꼼짝 않고 그리기만 할 작정이다.

“제게 목표가 하나 있어요. 10년쯤 뒤인 저의 80회 생일, 그동안 그린 걸 전시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다른 것은 준비하지 말라고 해뒀죠. 전시 끝나면 주변에 다 나눠주고요. 그때까진 그림만 그릴 생각입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