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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021년 6월] 뉴스 모교소식

“27동과 상산관을 오가던 시절 가장 행복했다”

허준이 호암상 수상자 강연
“27동과 상산관을 오가던 시절 가장 행복했다”

허준이 호암상 수상자 강연




“어딘가로 돌아온다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입니다. 오늘 그런 경험을 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수학계의 오랜 난제를 해결하며 세계 수학계의 ‘라이징 스타’로 꼽히는 허준이(물리02-07 고등과학원 스칼라 교수) 스탠퍼드대 수학과 교수가 모교를 찾았다. 5월 26일 모교 관악캠퍼스 상산수리과학관에서 열린 특강을 위해서다. 삼성재단이 수여하는 삼성호암상 과학상(물리·수학 부문) 수상을 기념해 열린 이 자리에서 그는 ‘로렌치안 다항식(Lorentzian polynomials)’을 주제로 수학 강연을 펼쳤다. 학창시절 지도교수와 재학생 등 50여 명이 현장에 참석하고 ‘줌’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100여 명이 강연을 들었다.

강연 첫머리에 그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가 27동(자연대)과 상산관을 오가면서, 매일 단조롭지만 소소하고 알차게 지냈던 석사과정”이라고 돌아봤다. 미국 출생의 허 동문은 초등학교부터 한국에서 다녔다. 검정고시로 모교에 입학해 물리천문학을 전공하고, 수리과학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졸업반 시절 모교에 방문교수로 왔던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대 명예교수의 대수기하학 강의를 듣고 수학에 매료됐다.

스스로 ‘구구단도 늦게 외울 만큼 수학에 소질이 없었다’고 했고, 본격적으로 수학을 전공한 것도 늦었지만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일리노이대 어바나 샴페인의 박사과정에 진학한 첫해에 40여 년간 풀리지 않은 ‘리드 추측’을 해결했다. 이어 ‘로타 추측’, ‘다울링-윌슨 추측’ 등의 난제를 연달아 풀었다. 이후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30대에 프린스턴고등연구소(IAS) ‘롱텀 펠로우’를 제안받고, 2018년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참석자 중 가장 젊은 나이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겉보기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수학 분야를 연결해 주는 일반적인 이론 틀을 고안해 냄으로써 난제들을 해결했다. 대수기하학의 방법론을 사용해 이산수학의 대상을 연구함으로써,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문제를 풀어낸 것이다. 조합과 기하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유의 대상 사이에 ‘다리’를 건설했다는 호암상의 평. 강연 주제인 ‘로렌치안 다항식’에 대해서도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서 두 개의 ‘컨벡서티(Convexity 볼록성, 2차 함수를 그래프로 그렸을 때 휘어진 곡선 모양이 볼록하거나 오목한 것)’ 이론을 상당히 재밌는 방식으로 연결해주기에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세계 수학계가 주목하는 학자
리드 추측 등 난제 증명해 주목

창의적인 연구를 해온 그에게 강연 후 질의 시간에 연구자의 자세를 묻는 질문이 잇따랐다. ‘연구의 영감을 어떻게 얻느냐’는 질문에 그는 “훌륭한 수학자 분들은 뭔가에 영감을 받거나,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어 해결해야겠다고 뚜렷한 목표를 잡기도 한다. 나는 특별한 모티베이션을 찾기보다 그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제일 재밌어 보이는 걸 해왔다”고 답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허 동문은 ‘골방에 혼자 앉아 몰입하는’ 이미지의 전통적 수학자와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현대 수학자의 연구는 다르다고 말한 적 있다. ‘로타 추측’도 두 명의 동료 수학자와 함께 해결했고, 이날 강연 내용도 스웨덴 수학자 페터 브란덴(Petter Branden)과 공동 연구로 얻은 결과였다. “연구하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좌절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청중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누군가’와 같이 쓰면 좋아요. 코워크(Co-work)의 가장 좋은 점이죠. 잘 안 되면 그 친구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면, 높은 확률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은사 히로나카 교수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학문의 즐거움’을 묻는 질문에는 “노트에 연필로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운을 띄웠다. “수학은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죠. 식이든, 계산이든, 명제(statement)든 노트에 꾹꾹 눌러서 쓰는 과정이 굉장히 즐거워요. 목수가 의자를 만들듯이,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쓰기 전에는 존재한다고 말하기조차 애매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느낌이 뭔가 굉장한 충만감을 줍니다. 그게 학문의 즐거움인 것 같습니다.”
이날도 그는 가지고 온 아이패드를 연결해 정갈한 손글씨로 쓴 수식들을 화면에 비추며 강의를 펼쳤다. 글씨뿐만 아니라 글 쓰는 것을 좋아해 10대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습작을 했고, 과학기자를 지망했던 적도 있다.

코로나19로 한국에 왔던 허 동문은 이달 중 미국으로 돌아간다. 6월 1일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해 상장과 메달, 상금 3억원을 받고 “수학은 나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아직 우리가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은 이해의 통합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소감을 남겼다. 허 동문의 아버지는 허명회(계산통계74-78)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 어머니는 이인영 모교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