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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2021년 4월] 뉴스 본회소식

조찬포럼: 불행한 역사도 ‘밖에서’ 보면 강인한 역사

허성도 모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불행한 역사도 ‘밖에서’ 보면 강인한 역사

허성도 (중문68-72)
모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세계사적·객관적 접근해야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선조들은 그 빌어먹을 당파싸움하다가 500년 만에 나라를 망쳤다.’ 여기엔 두 개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번 다시 보시겠습니까?”

4월 8일 본회 조찬포럼에서 펼친 허성도(중문68-72) 모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의 강의 첫머리다. 명강의라는 소문다웠다. 시각 자료 하나 없이 마이크 하나만 쥐었는데 흡인력이 대단했다. 국내 최초로 현대 중국어 문법을 연구한 그는 한문과 국학 연구를 통해 남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풀어낸 ‘우리 역사 다시 보기’ 강연으로도 이름이 드높다. 10여 년 전 이 강의의 내용을 요약한 텍스트본이 지금까지 인터넷에 공유될 정도다.

그가 말하는 ‘다시 보기’는 ‘과학적, 객관적으로’ 보는 것. “쉽게 말해 ‘위에서 봤으면 아래에서, 안에서 봤으면 밖에서도 보자’”며 그동안 우리를 주눅들고 자조하게 만든 역사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는 언변으로 깨트려 나갔다.

먼저 그는 “동시기 다른 나라 왕조 중 조선왕조처럼 500년 이상 간 왕조가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간 왕조를 놓고 망한 원인만 찾았다”는 것이다. “고려 475년, 신라 992년, 고구려 705년, 백제 678년.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최장 수명을 가진 왕조로만 연결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너무 무심하지 않았습니까. 망한 이유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 오래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볼 수 없습니다.”

조선 멸망 원인으로 꼽히는 당파싸움에 대해서는 결론부터 던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존재하는 모든 조직과 사회엔 당파싸움이 존재한다”는 것. 사색당쟁을 조선사회만의 특징이 아닌 인류 보편성의 문제로 인식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욕의 역사도 “불행한 역사라는 생각을 잠깐 버리고 바깥에서 보자”며 시각을 달리 했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기억하는 병자호란에 대해서다. “대통령의 최고 임무는 국가를 보위하는 것이죠. 인조 또한 항복을 했건 자식을 인질로 보냈건, 조선이라는 국체를 유지했습니다. 청나라를 300년간 지배한 만주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역사는 이것을 얘기해줍니다.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 강한 민족이 아닙니다. 살아남는 민족이 강한 민족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맹렬한 독립운동을 하고, 집권층에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진 건 조선뿐”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허 동문은 윤봉길을 가리켜 “인구 4억의 중국에 저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던 장개석의 말을 손수 번역해 국내에 알린 적 있다.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사료와 통계자료를 인용한 ‘뒤집어 보기’가 숨가쁘게 이어졌다. ‘조선의 백성은 정말 못 살았을까’, ‘피난한 선조를 비겁하게 봐야 할까’….

허 동문은 이처럼 객관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것과 요즘 유행하는 소위 ‘국뽕’은 전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전공 분야와 더불어 꾸준히 국학 연구에 매달려온 그다. 한자 전산화부터 시작해 삼국사기 등의 국학 자료를 전산화하는 일에 꼬박 10년을 바쳤다. 2014년 모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보기 위해 세계사 책을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교수 시절 전공책만 보다가,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보며 빛나는 자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강연 말미, ‘듣기엔 좋은데, 믿어도 될까’ 싶은 청중의 심리를 간파한 듯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선조들에게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의심하고 안 믿는 습관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통계학자가 ‘쌔 빠지게’ 연구해서 내놔도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하죠. 그렇게 교육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는 우리가 옳다고 믿고, 심지어 영원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의심해보는 겁니다. 당시의 세계를 같이 보고, 객관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 역사와 세계사가 다시 보일 겁니다.”

본회는 이날 참석한 40여 명의 동문에게 허 동문이 중국 고전 명상을 주제로 쓴 책 ‘생각’을 증정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