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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021년 3월] 기고 에세이

모교를 떠나며: 지혜와 전망을 배운 7평짜리 연구실

박명규 모교 사회학과 교수

모교를 떠나며


지혜와 전망을 배운 7평짜리 연구실




박명규
사회74-78
모교 사회학과 교수



베이비 붐 1세대에 해당하는 우리 세대의 삶은 한국의 고도성장 시대와 고스란히 겹칩니다. 한국전쟁 직후의 가난과 독재에서 시작하여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의 과정을 몸으로 겪어왔습니다. 공부 잘한다는 것만으로 존중을 받고 자부심을 느끼며 계층상승이 가능했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대단한 서울대학교의 위세 속에서 조국의 미래는 관악에 있다고들 할 때 서울대 교수로 봉직하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습니다. 탁월한 동료들, 좋은 연구여건, 뛰어난 학생들로부터 신선한 자극을 받으며 우리의 삶은 늘 윤택했습니다. 그동안 누린 많은 것들이 서울대학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의 모습이 바뀌어온 역사도 우리 세대의 삶의 궤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캠퍼스에 최루탄 가스가 가득했던 때의 암울함과 민주화의 열기가 하늘을 찌르던 열광, 각자도생의 불안감이 스산하게 퍼져있는 오늘의 대학현실이 나의 머리엔 어색하게 공존합니다. 자율화를 꿈꾸던 법인화 출범 당시의 기대와 외부의 간섭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서울대의 현주소도 어울리지 않게 겹쳐있습니다. 개성적인 학생들의 발랄함과 만들어진 모범생의 소심함도 오버랩 됩니다. 심심하면 서울대 책임론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함과 급변하는 교육현실에 무심한 내부의 불감증도 묘한 앙상블을 이룹니다. 이제 학교를 떠나면 이런 긴장과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면서 혁신과 창의의 동력도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초연결의 기회, 유투브에 널려있는 다양한 지식, 기업과 민간조직의 융복합 역량으로 대학 외부에 새로운 지식 생태계가 탄탄히 구축되고 있습니다. 교수의 저작보다 영화나 음악의 메시지가 훨씬 큰 반향을 불러오고 SNS 가 비지니스와 여론형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창업한지 불과 십여년에 불과한 플랫폼 기업이 세계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대학을 자퇴한 CEO의 도전이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최고수준의 연구와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중요성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울대의 위상을 보장해 주리란 근거는 못됩니다. 부단한 자기성찰과 혁신의 노력이 없으면 국내최고라는 자부심, 외양의 명성은 장애물로 변할 것입니다. 전례없는 기술혁신의 충격과 공동체 위기의 징조들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적 비전형성의 지적 고투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코로나 19라는 대재앙 앞에서 정부도 사회도 눈앞의 감염자 숫자 줄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 특히 서울대는 이 재난이 가져올 사회적 비용과 문명적 전환을 정면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온라인, 비대면, 초연결, 가상공간의 환경이 확대될 때 현재의 학교, 교회, 극장이 각각 교육과 종교와 예술을 뒷받침할 제도로 충분할지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할 때면 관악을 바라보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서울대의 존재이유를 새롭게 구축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지난 주 연구실을 정리하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7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전망을 접했고 제자들의 총기와 열정, 신선한 비판들을 만났습니다. 현실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도발적인 생각과 상상여행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밀실같은 곳이었지만 우주에까지 닿는 열린 플랫폼이었지요. 그만큼 이 공간을 떠난 후의 상실감이 염려도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도 있습니다. 집안청소와 설거지의 실력도 좀 더 쌓고 자녀와의 못다 한 대화도 늘이고 미뤄둔 취미활동에도 더 많은 시간을 분배할 것입니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도사의 신분과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하는 21세기 산책자로 나의 일상이 새로워질 기대를 가져 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을 있게 해준 가족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가족구성원 중 누군가의 수고와 도움에 큰 빚을 지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부모님께, 형제자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함께 가져주지 못한 아들딸에게, 그 무엇보다도 일생 고락을 함께 하며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은 배우자에게 깊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합니다. 퇴임하시는 모든 분들과 남아계신 서울대 가족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