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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020년 12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관악극회 ‘동굴가족’서 열연 지주연 동문 인터뷰

“원전 찾아 읽어라” 귓전 때린 이순재 선배의 권유



“원전 찾아 읽어라” 귓전 때린 이순재 선배의 권유

관악극회 ‘동굴가족’서 열연 지주연 (언론정보03-07) 동문

아마존서 7만원짜리 헌책 구입
배역의 숨은 의도 찾는데 도움

“바쁘더라도 네가 원전을 찾아 읽었으면 좋겠다.”

완곡한 권유였지만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교 선배이자 원로 배우인 이순재(철학54-58) 동문의 조언이었으니. 최근 종연한 관악극회 정기공연 ‘동굴가족(The Cave Dwellers)’은 1960년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혈거부족’이란 타이틀로 초연 후 6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다.

지주연(언론정보03-07) 동문은 극 중 ‘소녀’ 역을 맡아 열연했다.

1957년 발표된 외국 작가의 희곡 원전을 구한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을 터. 다시 한 번 이순재 동문의 격려가 귓전을 때린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소녀다. 소녀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니 네가 잘해야 한다.”

수소문 끝에 미국의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을 뒤져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노인한테서 헌책을 샀다. 책값은 배송료 포함 7만원. 결제 후 손에 넣기까지 보름 이상을 기다렸다. 인터뷰 내내 발랄한 웃음을 띠었던 것과 달리 은근 집요함이 엿보인다. 11월 13일 관악캠퍼스 소재 한 카페에서 지주연 동문을 만났다.

“고요한 밤, 원작 희곡을 읽다가 눈물이 흘렀어요. 극 중 소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물론 세계 대공황 이후 휴머니즘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던 원작자 윌리엄 서로연(William Saroyan)의 진심까지 느껴졌거든요. 번역본만 봤다면 놓치고 말았을 배역의 숨은 의미도 찾아낼 수 있었죠. 번역이 틀린 대사를 바로잡는 데도 큰 도움이 됐고요. 연출하시는 최종률(회화66-73) 선배님께 수정을 건의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우화적 휴먼 코미디의 성격을 띠는 ‘동굴가족’은 철거를 앞둔 낡은 극장에 스며든 노숙자들의 삶을 그렸다. 동굴같이 누추한 동시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곳에 살면서도, 품위와 유머를 잃지 않고 가족처럼 서로 아껴주는 인물들에게서 진한 휴머니즘을 느끼게 된다. 지 동문은 코로나19 때문에 대면 모임이 꺼려지고, 감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요즘, 따스한 위로가 되는 연극이었다고 자평했다.



“일행과 띄어 앉고, 밀폐된 공간에서 마스크까지 써야 하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찾아오셨습니다. 요즘 시국에 2시간 가까이 연극을 본다는 건 공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못 하는 일이에요. 출연한 모든 작품이 소중했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 배우로서의 사명감과 관객에 대한 경외심을 새삼 되새길 수 있었죠.”

극 중 소녀는 부모의 사랑조차 받아 본 적 없는 불우한 인물. 우연히 낡은 극장에 들어온 후 먼저 살고 있던 노숙자들과 교류하면서 사랑에 눈뜨게 된다. 이때 사랑은 또 다른 등장인물인 ‘소년’과의 사랑뿐 아니라 ‘대왕’, ‘여왕’, ‘공작’ 등과 함께 나누는 인류애적 사랑까지 포괄한다. 지 동문은 소녀가 사랑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자신 또한 치유 받았다고.

“소녀는 제가 가장 행복하게 연기했던 캐릭터입니다. 감사하게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저는 소녀의 처지나 심정을 잘 모르지만, 인물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얘가 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렇게 찾아진 교집합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사람 지주연을 바탕으로 한 지주연 스타일의 소녀가 창조된 거예요. 예전엔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완전히 다른 내 모습을 보여주겠어, 다짐하면서 말이죠. 욕심에 눈이 멀어 틀에 박힌, 관념적인 연기를 했던 거예요. 지금은 알아요. 어떤 배역이든 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요.”

지주연 동문과 관악극회의 인연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교 70주년 기념 공연 ‘법대로 합시다’ 때 처음 출연한 그는 2018년 ‘협력자들’, 2019년 ‘망자죽이기’ 때도 꾸준히 동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왔다. 올해 무대에 올린 ‘동굴가족’은 관악극회 특유의 지적인 예술성에 대중성을 충분히 가미시켜 “한 번 읽고 이해가 된 첫 작품”이라고 웃어 보였다.



“동문 선배들과 함께 공연하면서 배우로서의 삶의 자세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순재 선배님이 저의 롤모델이에요. 극단의 최고 연장자이면서도 가장 먼저 대본을 외우시고, 항상 연습시간 30분 전에 도착하세요. 어떤 일도 허투루 하시는 법이 없죠. 말 대신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시니까 후배인 제가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 한 학번 위지만 동갑이니까 말 놓게 해준 박재민(체육교육02-10) 선배와는 절친이 됐고요. 연기자로서 진심으로 저를 응원해주시는 정진영(국문83-89) 선배님은 저와 딱 맞는 캐릭터를 아직 못 만났을 뿐, 만나기만 한다면 그 전과 그 후의 연기는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2009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지주연 동문. 지난해 장편소설 ‘엄마 이름은 ___입니다’를 출간했고, 이제 곧 데뷔 12년 차가 된다. 그러나 아직 배우로서의 커리어보단 IQ 156, 멘사 회원과 함께 ‘서울대 출신’이란 수식어가 앞서는 편. 모교의 이미지에 뒤따르는 기대나 고정관념이 올가미처럼 느껴질 법도 한데, 지 동문은 담담히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순재 선배님이나 정진영 선배님을 소개할 때 누구도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우지 않아요. 영화와 연극, 드라마를 오가면서 축적한 수많은 출연작으로 그분들을 기억하죠. 제게도 모교 학위는 제가 노력해서 획득한 수많은 것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서울대 출신이란 수식어가 저 끝에 가서 붙을 수 있도록, 선배님들처럼 저도 한 발 한 발 배우의 길을 걷겠습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