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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호 2024년 5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매년 6월 호국의 달 외치면서 번듯한 6·25 추모공원 하나 없어서야”

한명희 (국악60-64)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매년 6월 호국의 달 외치면서 번듯한 6·25 추모공원 하나 없어서야

 

한명희 (국악60-64)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군 경험 담아 비목작사

젊은 죽음 오래 기억되길

휴전하고 12년 되던 1964ROTC 2기로 소위에 임관했습니다. 강원도 화천군 풍산리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비무장지대(DMZ)GP(감시초소)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요. 당시 연대장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한 소위 거기가 어딘지 아나?’ 되묻더군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면서요. 그러나 기왕 군대에 온 거 목숨 걸고 현장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남들과 똑같이 살다 가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했었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은 유명 가곡 비목(碑木)’의 작사가다. DMZ GP장으로 복무하면서 수많은 전사자의 유골을 목격한 그는 꽃망울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죽은 젊은이들을 떠올리며 가사를 썼다. 전쟁과 그 희생자에 대한 슬픔·안타까움을 넘어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노랫말은 정전 후 응어리졌던 민중의 마음에 가닿았다. 1969년 발표 직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물론 2022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대통령이 분향을 마치고 돌아갈 때 그 멜로디가 연주될 만큼 오래 사랑받고 있다. 430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이미시문화서원에서 한명희 동문을 만났다.

제가 군 복무할 당시엔 철책선도 없었어요.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말뚝을 박아놨을 뿐이었죠. 북한군이 우리 GP에 수류탄을 던지고 가거나 군 장병을 납치해 가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때 거기선 죽고 사는 게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지금이야 유해가 발굴되면 감식단이 현장을 찾는 등 야단법석을 떨지만, 당시엔 인골이 발에 치일 만큼 여기저기 널려있었죠. 남한이든 북한이든 힘없고 돈 없는 젊은 군인들이 전방으로 가지 않았겠나 싶어요.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동문은 GP장 복무 당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초소장과 마주 앉아 통성명하던 때를 떠올렸다. 순찰 중 우연히 마주친 북한군과 웃으며 악수했고, 인민군 병사들이 자신에게 총을 겨눈 상황에서도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인사했다. 나름 친해져서 국산 담배와 라이터, 와이셔츠 등을 선물했고, 제 딴엔 평양 최고 과자라고 하는 간식을 선물 받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남북한군 간 교류가 당시 전방에선 드물지 않았다고.

평양 최고 과자가 싸구려 마분지에 포장돼 있더군요. 우리한텐 저잣거리에서 파는 꽈배기나 다름없었죠. 북한이 참 가난하게 사는구나, 실감했어요. 다음엔 개성 찹쌀떡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시 만날 순 없었습니다. 수색대와 중대본부 간의 교신을 사단에서 도청하고 있었거든요. 상부에 발각돼 만나지 말랬는데 왜 만나느냐 질책을 받았습니다. 군 형법상 감옥에 가야 했는데 다행히 군단장 표창을 받은 게 있어 처벌을 면하고 16개월 만에 다시 후방으로 부임지를 옮겼죠.”

통일되면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북한의 박 중위를 다시 볼 순 없을 것이다.

둘도 없이 유순한 인상이건만 한 동문은 남자라면 일단 최전선에 가서 군 생활을 해봐야 한다고 일갈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가 어려움을 겪으며 강해질 새도 없이 너무 애지중지 키워 전부 약골이 됐다고 꼬집었다. 괜히 위험한 부대 가서 주검으로 돌아오면 어떡하냐고 묻자 어디서나 사람은 죽는다. 죽을 확률이 더 높아질 뿐이라고 답했다. 충청남도에 자대 배치받은 아들을 갖은 인맥을 동원해 전방 부대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가곡을 짓게 된 계기에 대해선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려다 보니 가곡이었다고 말했다.

전역 후 TBC 공채 3기로 입사해 음악방송 PD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라디오 방송에선 팝송과 유행가 일색이었죠. ‘고등학교 땐 우리 가곡을 배우기도 했는데 왜 남의 음악만 가져다 트느냐, 청취자의 취향에 편승하기보단 이끌 수 있어야 의식 있는 방송언론 아니냐주장했습니다. 꼬박 2년 동안 국장을 졸라 매주 20분짜리 가곡의 언덕을 제작했어요. 민영방송 사상 최초의 가곡 프로그램이었죠.”

방송국 내부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청취자의 엽서가 쇄도하면서 일일 15분짜리 가곡의 오솔길로 확대 개편됐다.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수백 곡쯤 될 줄 알았던 우리 가곡이 채 100곡이 안 됐던 것. 한 동문은 우리 가곡 신곡 만들기 운동을 주도했고, 고 장일남 작곡가와 함께 기존 가곡을 편곡하거나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비목이다. 이후 봄비’, ‘얼굴’, ‘기다리는 마음등 새로운 가곡 제작에 힘을 보탰다.

한 동문은 모교를 비롯해 전국 주요 대학에 출강했고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했다. 그런데도 다른 직함보다 비목의 작사가로 불린다. 한창 땐 제법 추앙받는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도 서른 즈음 발표한 가곡 하나가 일생을 뒤덮고 있는 셈.

관직은 저 아니어도 여러 사람이 거쳐 가는 자리인 반면, 노래를 비롯해 예술은 창작자 고유의 성과물이자 유구한 생명력을 가집니다. 화천군 평화의 댐 근처 비목공원에선 매년 비목의 탄생과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는 비목문화제가 열려요. 신록이 우거지는 6, 입버릇처럼 호국의 달이라고 외지만 말고 오롯이 6·25전쟁 참전 사망자를 기리는 번듯한 추모공원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 푸르름 어디에나 이 땅을 지키다 숨진 국군 장병의 넋이 서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나경태 기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곡 양지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 달빛 타고 흐르는 밤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 울어 지친 비목이여 / 그 옛날 천진스러운 추억은 애달파 /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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