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12호 2020년 11월] 뉴스 본회소식

제1회 동문 국토문화기행 화양구곡과 조선의 성리학

금강산 이남의 으뜸 산수 돈 5만원으로 알차게 즐겼습니다

11월 5일 진행된 제1차 국토문화기행에 참가한 동문 20여 명이 금사담 암서재 맞은편 길가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날 동문들은 몇 번을 왔어도 풍경만 보고 지나쳤던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게 돼 유익했다고 입을 모았다.


제1회 동문 국토문화기행 화양구곡과 조선의 성리학

금강산 이남의 으뜸 산수 돈 5만원으로 알차게 즐겼습니다


“돈 5만원으로 맛있는 점심 먹고 좋은 경치 보고… 매월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호(교육59-63) 동문
“이전에도 몇 번 왔었는데 이곳에 담긴 역사적, 사상적 의미는 오늘에야 알았어요. 정말 유익했습니다.”
-이혜숙(가정교육68-72) 동문



화양구곡 중에서도 절경으로 꼽히는 제4곡 금사담 바위 위에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이 암서재를 지었다(사진=크라우드픽).


본회 제1차 국토문화기행을 통해 동문 20명이 11월 5일 화양구곡(華陽九曲)에 다녀왔다. 이민부(지리교육74-78)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의 해설 및 안내로 진행된 이날 답사는 오전 8시 30분 압구정역에서 출발, 11시 45분 화양구곡 제1곡인 경천벽(擎天壁)에 도착해 제9곡 파천(巴串)까지 두루 돌아보고 오후 6시 30분쯤 서울로 돌아왔다. 참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동문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다”며 입을 모았다.

화양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 속리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화양천을 중심으로 한 약 3㎞ 길이의 계곡이다. 화양구곡의 화는 중국을, 양은 태양을 의미하며, 중국 유교 문화의 명승지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명칭 일부를 따왔다. 무이구곡은 주자가 머물며 가르침을 전했던 곳. 이름에서부터 뼛속 깊은 소중화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 화양구곡에 이러한 사상을 투영시킨 이는 조선 중기 주자학의 대가 송시열(1607-1689)이다.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혹은 망국적 당파싸움의 시초. 송시열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이렇듯 엇갈리지만, 죽는 날까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소신을 지켰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기호학파 서인 세력의 중심인 송시열은 주자학·성리학·소중화 사상의 학문적 위세를 등에 업고 충청도 최고 절경지를 접수, 화양구곡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므로 화양구곡 곳곳엔 명에 대한 사대의 사상이 녹아 있다.

“반도체, 자동차 보십시오. 한국전쟁 폐허를 딛고 반 세기만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면 제대로 해요. 중국 황제에 대한 칭송도 현지 문인들이 ‘너무 그러지 마라, 좀 살살 해라’ 할 정도로 대단했죠. 본토 학자들도 잘 모르는 어려운 한자를 써가며 수준 높게( ) 아부했습니다.” 이 명예교수는 또 말 그대로 하천에 9개의 굽이 있는 무이구곡과 달리 화양구곡은 똑바로 흐르고 있다며 없는 굽을 ‘굽 있다 치고’ 9개의 절경을 꼽아 끼워 맞췄으니 당시 중국 명나라의 비호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층층으로 쌓인 바위가 별을 바라본다는 뜻의 제5곡 첨성대(瞻星臺)엔 만절필동(萬折必東), 비례부동(非禮不動),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등 글씨가 새겨져 송시열의 사대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절필동은 황하가 만 번을 꺾으면서도 결국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소중화주의, 존명주의를 상징한다. 본래 경기도 가평군 대보리 조종암(朝宗巖)에 암각돼 있는 선조의 글씨를 옮겨왔다. 충신의 절개 혹은 사필귀정을 뜻하기도 한다.

전국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비례부동은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민정중(1628-1692)이 숭정황제에게서 받아온 글씨를 송시열이 받아 새겼다. 본래 숭정황제가 내린 글은 비례물동(非禮勿動), 화양계곡 인근에 있는 사찰 환장암(煥章庵)에 존치됐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하늘과 땅이 명나라의 것이고, 해와 달은 숭정황제의 것이라는 뜻이다.

제4곡 금사담(金沙潭)에도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다. 맑은 물에 비치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하여 금사담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화양구곡 중에서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데, 송시열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는지 이곳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 글방으로 삼았다. 현재의 암서재는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암서재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바위엔 충효절의(忠孝節義)와 함께 창오운단 무이공산(蒼梧雲斷 武夷空山)을 새겼다. 창오산은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명나라의 멸망과 효종의 승하를 안타까워하며 적은 글이다.

27세 때 장원으로 생원시에 합격, 학문적 명성을 날린 송시열은 1635년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된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이 청에 설욕하기 위해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 또한 관직에 나갔다. 이때 그는 왕에게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피력, 특히 명에 대한 존주대의(尊周大義)와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데, 이것이 효종의 의지와 부합하여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된다.

관직에 나아간 지 1년 만에 북벌 동향이 청나라에 밀고돼 조정에서 물러났지만, 효종의 신임은 여전하여 수차례 고위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기를 거듭, 8년 만에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에 오른다.

송시열과 효종의 두터운 신의를 상징하는 것이 화양구곡 중 제3곡 읍궁암(泣弓巖)이다. 효종이 급서하자 송시열은 매일 새벽 이 바위에 올라 통곡했던 것. 그 모습이 활처럼 엎디어 울었다고 하여 읍궁암이라 부른다. 본디 황제가 서거하면 활을 떨어뜨리고 운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읍궁암 바로 맞은편엔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만절필동에서 이름을 따온 이곳은 명나라의 두 황제, 신종과 의종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조선 숙종 30년(1704)에 세워졌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냈고, 의종은 명의 마지막 황제다. 황제를 모시는 곳에 쉽게 올라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아 계단과 계단 사이의 경사가 무척 가파르고 발 디딜 곳이 좁다. 이 명예교수가 직접 경사각을 재어 최고 70도까지 급경사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줬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1690-1752)은 ‘금강산 이남에 으뜸 산수’로 화양구곡을 꼽았다.


시계방향으로 화양구곡 제1곡 경천벽, 제2곡 운영담, 제9곡 파천, 제3곡 읍궁암.


화양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1곡부터 9곡이 순서대로 펼쳐지므로 제1곡 경천벽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 화강암 절벽의 모습이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과 닮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그러나 하늘은 자연 그대로의 하늘이 아닌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를 뜻하며, 하늘의 중심인 중국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1곡에도 사대의 사상이 스며 있다.

제2곡 운영담(雲影潭)도 마찬가지. 실제로 물이 맑기도 하지만, 중국 황제가 세수를 하려고 몸을 숙였는데 그 물에 구름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제6곡 능운대(凌雲臺)부턴 사대주의적 색채가 약해진다. 능운은 구름을 뚫고 넘는다는 뜻으로, 뛰어난 의지를 일컬어 능운지지(凌雲之志)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 유명한 기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 오르면 첨성대를 포함한 계곡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허나 그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높이 치솟아 있진 않다. 이 명예교수는 “조상들이 다녔던 길에서 보면 지금 우리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조망이 펼쳐진다”며 “이름에 과장이 좀 있긴 하지만 선조들의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해설했다.

제7곡은 누워있는 용의 모습을 한 와룡암(臥龍巖)이다. 비스듬히 계곡을 질러 뻗은 바위가 용이 굼실거리는 듯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는데 용의 머리 부분이 길 가장자리 밑으로 들어가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 명예교수는 “지금이라도 시멘트 길 대신 교각을 세워 머리 부분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석의 표면에 화강암이 마식된 다양한 모양도 설명했다.

제8곡은 학이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른다는 학소대(鶴巢臺). 예전에는 정말 학이 둥지를 틀어 새끼를 길렀다고 하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9곡은 바닥을 파고들며 흐르는 계곡물이 마치 흩뿌려놓은 꽃잎을 꿰어놓은 것 같다 하여 파천이라 부른다. 현장 안내판엔 꽃이 아니라 ‘용의 비늘’을 꿴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명예교수는 “한자 파천은 우리 한자 발음으론 파관이라고 읽어야 하나, 천으로 읽는 것은 중국 자체 발음을 반영한 것”이라며 전문가들이 논의하여 “고쳐야 될 부분”이라고 말했다.

장순근(지질65-69) 동문은 파천의 화강암 암반 한가운데 색이 다른 암색 띠를 짚으면서 이를 암맥(dyke)이라 부른다며 지질학적 해설을 덧붙이기도 했다.

10월 24일 동문 등산대회에 이어 이날 국토문화기행에 참가한 양준호(ALP 11기) 동문은 “총동창회 조찬포럼 회비 또한 4개월치를 미리 납부했다”며 앞으로 개최될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나경태 기자


인터뷰

현장에서 배우는 역사, 더 깊고 풍부하죠

기획 해설 이민부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본회 국토문화기행 해설 및 안내를 맡은 이민부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대한지리학회장, 한국지형학회장 등을 역임한 환경지리 분야 전문가다. 학술·교육·연수·문화·공공 답사 등 다양한 성격의 답사를 두루 인솔했으며, 답사지에서의 서정을 녹여 시집 ‘길에서 쉬다’를 출간했다. 이 명예교수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단순한 친목을 넘어 학술적 성격까지 엿보인다. 이번 행사의 기획 취지는.
“국토는 국가 존립의 1차 근거이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삶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이다. 국토문화기행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지리라 하더라도 더 정확하고, 더 풍부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답사지로 화양구곡을 택한 이유는.
“지리는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나눌 수 있는데, 화양구곡은 이 두 가지 지리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곳이다. 조선후기 주자학의 대가 송시열이 학문적 위세를 등에 업고 충청도 최고 절경지를 접수했다. 그리고 그곳에 주자가 강학을 했던 곳의 지명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이름 붙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자신이 갖고 있던 모화사상을 투영시킨 것이다. 명나라 황제 숭정제에게서 받아온 글씨 ‘비례부동(非禮不動)’등 여러 글씨를 화양구곡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나아가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폐해가 자연 경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수십 명을 인솔해 지역 명승지를 다녀온다는 게 쉬워 보이지 않는데.
“답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을 학생이나 학술회원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게 학자의 천성인 것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더 나아가, 대중과 현장 답사를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2004년 고교 동기회를 통해 우연히 답사 요청을 받았고, 그해 가을 강원도 철원을 다녀왔다. 반응이 좋아 그 뒤로 봄가을에 걸쳐 총 31차례 전국을 누볐다. 총동창회 국토문화기행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진행할 계획이다.”

-다음에 답사할 곳은.
“임진강변의 역사지리, 철원과 연천의 현무암 용암대지, 추가령 열곡 등을 고려 중이다. 임진강변은 본인이 20년 이상 학술연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강 지역을 첫 답사지로 점찍어 뒀으나, 돼지열병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화양구곡부터 다녀왔다. 답사 땐 해당 지역의 지형, 지질, 역사지리, 산지와 하천의 환경 문제 등을 폭넓게 담은 답사 자료집을 배포할 예정이다.”

-기억에 남는 답사지는.
“미국으로 박사 유학 갔을 때 미국 서부를 보름 동안 4차례 다녀왔었다. 자연지형, 지질과 함께 서부 개척사를 다뤘던 게 기억에 남는다.”

-국토문화기행 홍보 한 말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답사의 장점은 무엇보다 함께하면서 그 지역 문화와 자연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함께, 자연, 즐거운 공부’가 국토문화기행의 모토라 할 수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학식이 높은 동문 참가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심껏 안내와 설명에 임하겠다.”


기고문

화양구곡에서 화양연화를 생각했다

참가 소감 정연옥 (KFL 8기) 동문



파올로 조르다노는 그의 저서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자유지만 가택연금 상태”라고 말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가택연금을 헤치고 국내여행이라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마침 총동창신문에서 ‘제1회 국토문화기행’이라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와우, 가자, 떠나자, 들로 산으로 자유롭게 훨~훨~ 나비처럼’ 그런데 왜 그 많은 역사유적지 가운데 첫 답사지가 화양구곡(華陽九曲)일까 화양구곡이란 말을 들으니, 갑자기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떠올랐다.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자는 다르지만, 답사하는 모든 분들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는 이민부 명예교수님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총동창회 이승무 사무총장 인솔하에 우리는 오전 8시 30분, 정해진 시간에 충북 괴산을 향해 출발했다. 주최측에서 마련한 음료수, 귤, 김밥을 차 안에서 먹으며, 이민부 교수님께서 배부하신 ‘화양구곡과 조선의 성리학’이라는 답사 자료와 이 교수님의 시집을 읽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청명한 하늘과 신선한 공기,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 문화기행은 살아있음의 환희를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게다가 지리학 전공자다운 구체적이고 멋진 설명은 평범해 보이는 바위, 산, 계곡을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곳을 국토문화기행 1차 대상지로 선택한 이유는 구곡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위, 소(沼), 절벽 등 자연경관이 우수하며,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탁월한 선택을 하여 우리에게 행복한 시간을 제공해 주신 이민부 교수님과 주최측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