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호 2024년 10월] 뉴스 본회소식
연못 위 서당에서 느끼는 송시열의 숨결
제8차 국토문화기행
연못 위 서당에서 느끼는 송시열의 숨결
1. 우암사적공원 내 이직당. 우암의 직(直) 사상을 담고 있다. 2. 남간사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진홍살문. 3. 남간정사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동문들. 4. 우암사적공원 위치를 담은 지도. 5.남간사 출입문 앞에서 손가락하트 포즈를 취한 동문들의 기념사진.
우암사적공원·유회당 탐방
남간정사 내부 특별 공개
“길에서 사약받은 우암 기구”
“신문물 배격한 조선 아쉬워”
“와.”
제복 입은 경찰 둘이 굳게 닫혀 있던 남간정사(南澗精舍)의 문을 열자 연못가를 둘러싸고 이를 지켜보던 동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건물 외관만 관람이 허용되나 안내를 맡은 성봉주(체육교육84-89) 동문이 대전시와 사전 협조해 특별히 내부까지 공개한 것. 현판 아래서 또 건물 안에서 멋진 풍광을 즐기며 동문들은 연신 셔터를 눌렀다.
흐르는 물 위 남간정사
9월 26일 본회 국토문화기행을 통해 동문 50여 명이 우암사적공원과 유회당을 둘러봤다. 우암은 송시열(1607~1689년)의 호고, 유회당은 그의 외손자 권이진(1668~1734년)의 호다.
우암사적공원은 우암 송시열을 선양하기 위해 대전광역시에서 110억원을 투입해 조성한 사적공원으로 1998년 개장했다. 남간정사와 함께 송자대전판이 문화재로 남아있으며, 주요 시설물로 남간사(南澗祠), 기국정(杞菊亭), 이직당(以直堂), 명숙각(明淑閣), 심결재(審決齋), 견뢰재(堅牢齋) 등이 있다.
남간정사는 성리학의 대가이자 ‘송자’라고 칭송받았던 대학자 송시열이 1683년 건축한 서당. 계곡의 맑은 물이 대청 밑을 지나 연못으로 흐르게 한 까닭에 이 건물은 정면이 아닌 뒤로 출입하도록 설계됐다. 우리나라 정원은 자연경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차경(借景)의 원리를 이용해 정원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남간정사는 흐르는 물 위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차경을 꾀했다. 수로에는 높은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얹어 대청마루가 높이 뜨도록 했고, 건물 네 귀퉁이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팔각주초석에 보조 기둥을 세워 길게 뻗은 처마를 받친다.
연못을 둘러보고 남간정사에 가려면 납작 엎드린 거대한 나무둥치를 지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깊숙이 몸을 낮추게 돼 마치 서당의 수문장이 이곳 주인에 대한 예의를 넌지시 강요하는 것 같다. 남간정사는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 2칸 통칸에는 우물마루의 넓은 대청을 들였다. 대청 왼쪽은 전후 통칸의 온돌방이며, 오른쪽은 뒤쪽 1칸을 온돌방으로, 그 앞 1칸을 아궁이 함실을 설치하기 위해 대청보다 조금 높여 우물마루를 들였다.
남간정사의 남간(南澗)은 ‘양지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뜻하는데,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에 대한 숭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 부지 내에 우암이 손님을 맞이할 때 썼던 정자인 기국정을 소제동에서 옮겨와 연못가에 배치했다. 남간정사 뒤편 오르막엔 남간사가 있다.
유교적 문화 가치 계승 중시
우암사적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남간사는 우암 송시열, 석곡 송상민, 수암 권상하 등 3인을 모시고 봄가을 제향을 지내는 사우(祠宇)로 쓰인다. 이직당은 우암의 ‘직(直)’ 사상을 담고 있으며, 명숙각은 선비들의 공부방으로, 심결재 및 견뢰재는 기숙사로 쓰였던 곳이다.
안내를 맡은 성봉주 동문은 “남간정사가 워낙 유명한 데다 걷고 사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아 이번 국토문화기행 답사지로 선정했다”며 “풍경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유익한 여행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우암 송시열은 기골이 장대하고, 평균수명 40세 안팎이었던 시대에 83세까지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635년 왕자의 사부가 되기도 했고 52세에 우의정에 오르기도 하지만, 예송 논쟁 등 정치적 지형 변화에 따라 멀리 유배를 당하는 등 인생의 부침을 크게 겪은 끝에 사약을 받았다. 박용대(사회사업73-77) 동문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복권됐다 귀양 갔다 하면서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은 우암의 삶이 기구하다”고 탄식했다.
우암은 한족 또는 명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예의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문화 가치에 대한 존숭 및 계승을 중시했다. 동시에 청을 낮추어 본 까닭에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겪은 연이은 치욕을 개탄하면서 오랑캐에 패한 나라의 관리가 될 수 없다며 10년간 관직에 나가지 않았었다. 당시 그가 나무뿌리로 쓴 ‘恥’라는 한 글자가 우암사적공원 ‘유물관’에 걸려있다.
허운순(IFP 11기) 동문은 청의 선진 문물을 제대로 접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배격했던 당시 조선의 대응을 안타까워하면서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고 말했다. 8년간 억류돼 있으면서 조선과 청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던 소현세자는 서학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으나 귀국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독서·교육 위해 지어진 유회당
점심 식사 후 찾아간 유회당은 권이진이 부모의 묘에 제사 지내면서 독서와 교육을 하기 위해 1714년 지은 건물이다. 대전 소재 다른 고택과 달리 안동 지역 특색에 따라 지어진 건물로 안동 권씨는 본디 안동 김씨에서 유래됐다고 문경희 해설사는 말했다.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자 권이진의 선조인 김 생이 왕 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왕 건으로부터 권씨 성과 함께 4대 명당으로 꼽히는 이곳 유회당의 터를 하사받았다고 덧붙였다. 4대 명당이란 소개에 동문들은 경사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 올라가 선산 이곳저곳을 살폈다. 묘 아래엔 따로 살림집이 있어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동문들은 멋진 풍경 앞에선 서로 사이좋게 사진을 찍어주고, 가파른 계단과 오르막길·내리막길을 오갈 땐 넘어지지 않게 손도 잡아주며 우정을 나눴다.
방남순(가정관리70-74) 동문은 “대학자 송시열의 발자취를 따라간 보람찬 하루였다. 아침에 날이 흐려 걱정했는데 다행히 화창해졌고, 함께 여행한 동문들과 즐거웠다”고 말했다.
김현진(기악67-71) 동문은 “세 번째 참가하면서 낯익은 동문들도, 친해진 동문들도 많아졌다. 미리 공문을 보내 더 풍성하게 남간정사를 관람하게 해준 주최 측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최연소 참가자였던 김재원(의학11-17) 동문은 “카이스트에서 근무 중에 행사 안내 메일을 받았다. 대전에 수년째 살고 있지만,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데 오늘 모임을 통해 많이 배웠고, 선배님들 뵙게 돼 반가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동호(교육59-63) 동문은 “고향이 대전이었는데도 우암사적공원엔 처음 가 본다”고 반가워했고, 김춘옥(불문68-72) 동문은 “다른 여행 상품도 많지만 고령자는 참가 신청이 제한돼 아쉬웠는데 동창회 모임을 통해 국내 명승지를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나경태 기자
우암사적공원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