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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2020년 5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내가 다시 신입생이 되는 방법

이명석 문화비평가
녹두거리에서
 
내가 다시 신입생이 되는 방법
 

 

이명석
철학88-92
문화비평가
 
 
작년 이맘때다. 봄꽃이 휘날리는 잠실나루역을 거닐다 ‘서울 책보고’라는 거대한 헌책방에 들어갔다. 터널 모양의 서가에는 여러 헌책방에서 모은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대학 때 읽던 책들은 특히 반가웠다. 그러다 서가 한쪽에서 정말 진기한 책을 발견했다. 서울대 문리대 시절의 교지였다. 나도 관악에서 교지를 만들었기에 더 관심이 갔고, 어떤 글들이 실려 있나 궁금해하며 펼쳐보았다. 그리고 학부 때의 지도교수님이 학생 시절에 쓴 글을 발견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신기했다. 선생님도 학생 시절이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오며 대학 때의 교수님들을 떠올렸다. 3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신입생 환영회가 선명히 생각났다. 선배들은 운동가요, 신입생들은 대중가요를 돌아가면서 불렀고, 교수님 중 한 분이 ‘적벽가’를 중국어로 읊은 뒤 우리말로 번역해서 들려주셨다. 밤이 깊어지자 교수님들이 먼저 일어나셨다. 그렇게 다 떠나셨나 했더니 한 분이 남아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신입생 환영회를 이렇게밖에 못하나?” 군기라도 잡으려나 싶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 “야자 타임을 해야지.” 아하하 웃음이 터지자 벌떡 일어나셨다. “안녕하십니까? 철학과 77학번 김영정입니다.”
 
그때 신입생이 88학번. 그러니까 30대 초반에 신임 교수로 들어오셨던 거다. 자연과학도 아니고 인문과학에서 그 나이에 교수 임용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는 잘 몰랐다. 선배들이 말하기엔 ‘천재중의 천재’만 가능하다고 했다. 나이만 젊은 게 아니라 마음도 젊어, 학생들과 밤늦게 술 마시며 대화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다른 교수님들로부터 ‘애들이 얕잡아 본다’고 야단맞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오전 첫 수업에 칼같이 나타나셨고, 하숙집에 뻗어 있던 학생들의 출석부엔 가차없이 엑스 표시를 하셨다.
 

일러스트=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너희들 신입생 환영회를 이렇게밖에 못하나?”
군기라도 잡으려나 싶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
“야자 타임을 해야지.”
 
신입생 환영회 때 누군가 쭈뼛쭈뼛 손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나는 우문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이라고 하면 되지. 그런데 김영정 선생님은 그 고민이 왜 나왔을까, 차근차근 분석하고 해설한 뒤에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이라 부르면 제일 좋습니다.” 대학 생활을 하며 차차 알게 되었다. 강의실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분에도 차등이 있다는 사실을. 시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게 ‘선생님’이다. 사회 생활을 하며 또 알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가진 무게를. 하지만 단지 ‘선생님’에 만족하는 분이 거기에 있었다.
 
몇 년 전에 생긴 유행어 중에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준말이다. 문과 출신이라서 취직을 제대로 못한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직업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내 생존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기술을 대학 때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를 통해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기술이다. 나는 요즘 기업의 신입사원들에게 글쓰기와 생각법을 가르치는데, 뛰어난 스펙과 외국어 능력을 갖춘 인재들이 논리와 문해력의 기능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김영정 선생님은 이런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아셨다. 그래서 서울대 입학관리본부장, EBS 논술연구소장으로 논술고사를 주도하며 논리학의 대중화와 공교육화를 주도하셨다. 그러다 과로로 인한 부담을 심장이 버텨내지 못해, 2009년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생각이 어지러울 때마다 선생님이 강단에 서 있는 ‘일반 논리학’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 여전히 신입생처럼 배울 수 있다.
 
*이 동문은 문화비평가이자 전방위적 저술가이다. 인문학 강연을 하며 콘텐츠 자문가, 보드게임 해설가, 파티 플래너, 안무가, DJ, 방송 패널, 일러스트레이터 등으로 활동한다. 저서 ‘빈칸 책’, ‘논다는 것’, ‘해보자 재밌네 될 테야’ 등을 통해 참여와 놀이의 생각법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