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48호 2023년 11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누구에게나 비틀즈가 있다 

박성훈 정치69-73 수필가 전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추억의 창


누구에게나 비틀즈가 있다 



박성훈
정치69-73
수필가
전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오랜만에 인천 국제공항에 배웅을 나갔다. 공항 로비의 한적한 코너를 돌아보고 있는데, 저편에 게이트 쪽에서 갑자기 환호성과 함께 우르르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광팬클럽을 몰고 다닌다는 어떤 정치인은 아닐 터이고 스포츠 스타인가보다 생각하면서 덩달아 인파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이돌 가수란다. 대형 카메라, 스마트폰 카메라, 심지어 사다리까지 들고 뛰는 20대 여성들, 중국어도 섞인 소음 속에 이 무리들은 어떻게 이 연예인의 여행 일정을 알고 모여들었을까. 

1969년, 대학에 입학했던 그해, 영국 가수 ‘클리프 리차드’ 내한공연이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있었다. 그 곳은 예배드리는 채플이라 찬송가 멜로디가 벽돌마다 배어 있는 경건한 성역이다. 하지만, 그날 공연장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여 괴성과 비명 끝에 심지어 기절도 하고 손수건, 양말들이 날아다녔다는 보도를 나중에 보았다.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인가. 아니면 자존감의 차이인가.

서울대 학창 시절, 우리는 동숭동 하숙집에 모여 앉아 라디오 음악을 듣다가 좋아하는 팝송이 나오면 함께 따라 부르면서 공감을 나누고 고독감을 달랬지만, 열정적인 집단 감성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먼 나라 흑인 가수 냇 킹 콜의 꿈결 같은 노래 ‘월버튼 마운틴’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애창곡이었다. 서울대생들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었으니, 광팬 같은 현상은 없었을 듯하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오래전에 읽었던 ‘Reader's Digest’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어느 미국인 주부가 쓴 ‘Everyone has a Beatles’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중학생 딸아이가 비틀즈의 광팬인데, 집안 내부를 비틀즈 사진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해 모녀 간에 극심한 갈등을 빚다가, 엄마가 자신의 소녀 시절을 뒤돌아보며 어느 세대이든 누구에게나 우상은 있기 마련임을 인정하고 모녀가 비로소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모녀 간에도 ‘내로남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교주처럼 떠받드는 아이돌 현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독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에, 한낱 허상임을 알면서도 인간은 끝없이 무지개 속에 바벨탑을 짓는 꿈을 꾼다. 그러나 종교도 정치도 학문도 예술도 우리를 고독과 허망으로부터 쉽게 구원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고독과 허탈감을 다소나마 해소해주고 불가능한 꿈을 잠시라도 대리 만족시켜 주는 존재가 우상이거나 초인일 테고, 꿈을 집단으로 공유하며 우상과 더불어 마취되는 환각의 시간만큼은 고독도 울분도 사라질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석양 무렵이 되면, 집 근처에 있는 종합운동장에 가서 맨손체조도 하고 평행봉 철봉도 하고 드라이버 골프채로 스윙 연습도 하곤 한다. 종합운동장 내에 있는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야간경기가 있는 날에는 함성과 응원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거친 북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호전적인 고함소리가 어우러지면, 그 집단 에너지와 열기의 방출이란 장난이 아니다. 인간의 몸과 본성의 저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울분과 꿈을 우려내고 토해내는 포효라고나 할까. 그 울부짖음은 과연 어디에 누구를 향한 것일까. 

2000년 전 로마 시내 한복판 ‘콜로세움’에서 울려 퍼지던 함성과 어떻게 다를까 상상하며 나도 평행봉에 양팔을 걸고 공중을 향해 솟구쳐 본다.


*박 동문은 모교 졸업 후 통일부 정보분석실 제1분석관, 통일정책실장, 남북회담사무국 상근위원, 청와대 통일비서관 등을 역임하고 통일부 통일교육원장을 지냈다. 공직 퇴임 후 호원대, 서울시립대 등 강단에서 동서독 분단과 통일과정, 남북한 관계, 북핵문제 등을 강의하며 월간조선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과 에세이를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