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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020년 4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술과 세상을 만끽하는 방법

허시명 술평론가, 막걸리학교 대표


술과 세상을 만끽하는 방법



허시명
국문81-85
술평론가, 막걸리학교 대표




나는 어떻게 하면 세계의 대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나 궁리중이다. 올해는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달방을 잡고 음악 공연을 들으며 한 달을 보내고 싶었으나, 코로나19로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수도원맥주를 파는 지하 광장이 있어, 그곳에서 족발 요리인 학센에 감자튀김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허공에 뜨고 말았다.

지난해에는 뉴욕에서 막걸리를 핑계로 한 달을 살았다. 나의 여행은 일과 놀이가 혼재되어 있다. 내게 일과 놀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돈이 넉넉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나의 노동은 환전이 되어야 한다. 환전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한다는 뜻이다. 일과 놀이의 구분이 무의미할 수 있는 것은, 일이나 놀이보다 내 마음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통하는 일을 하면 그게 가능하다.

나는 술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뉴욕에 간 것은 한국 문화로서 막걸리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뉴욕 맨해튼에서 케이팝과 한국 음식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올해도 방탄소년단이 맨해튼 타임스퀘어에서 새 음반으로 팬들과 만났다. 맨해튼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쭈빗거릴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 그냥 내가 즐기면 뉴요커들에게 손짓하여 함께 하자고 둥근 원을 그리면 된다. 나는 그 원 안에 막걸리를 던져 넣고 싶어서, 맨해튼의 홀 넓은 주점에서 술빚기 행사를 했다.

그날 까칠한 뉴욕 음식평론가가 술빚기에 참여했다. 통역을 맡는 음식전문가도 사뭇 긴장을 했다. 까칠한 뉴요커가 혹평을 해서 마지막 자리를 싸늘하게 만들어놓기 일쑤라고 했다. 한인마트에서 경기미와 누룩을 사서-한국의 마트에서는 누룩을 팔지 않지만, 뉴욕 한인마트에서는 한국산 누룩을 판다-고두밥을 찌고, 스테인리스볼 50개에 나눠담아 50명과 함께 술빚기를 했다. 고두밥과 누룩과 물을 섞어서 손으로, 비위생적일 수 있으니 1회용 장갑을 끼고 손으로 열심히 치대서 술을 빚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모두가 일상으로 술을 마시지만, 모두가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나는 말한다. “쌀로 만들어지는 저알코올 탄산 음료를 누대로 즐겨온 민족이 한국입니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는 김치와 불고기에 이제는 막걸리도 추가해주세요.” 몇몇 교포 2세도 눈에 띄어서 “막걸리는 나눠먹기 좋은 음식입니다. 그러니 뉴욕에서 막걸리를 빚어 이웃과 즐겨보십시오, 부모님의 고향이 내 어깨에 숄처럼 걸쳐져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라는 말도 했다. 그날의 내 술 강의는 그렇게 끝났고, 까칠한 뉴요커 음식평론가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새로운 것을 탐하고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뉴욕 문화라서 더 흥겨운 자리였다.

술빚기 행사는 즉석에서 그 결과를 맛볼 수 없다는 게 단점이다. 발효가 되려면 열흘은 기다려야 한다. 개인별로 쌀 1kg으로 체험을 하고 물과 누룩을 섞어 3리터 정도를 가져가니 집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완성된 술맛을 모를 테니, 그들도 답답하고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마음 같아서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술을 관리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주최 측과 협의하기를, 한 날 한 자리에서 술을 빚고, 술을 걸러 맛보기 위해서는 내가 적어도 보름은 먼저 뉴욕엘 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술빚기는 간단하다. 내가 빚어두면 그다음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효모가 다 알아서 한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으면 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동네를 여행하는 일이다. 여행이라 하여 짐을 꾸려 다시 떠나는 것은 아니다. 술독을 지켜야 하니, 나는 그곳의 일상 속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여행하면서 매일 숙소를 옮기더라도,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을 맴도는 것이 내 여행의 습관이다. 내 숙소는 맨해튼 허드슨강가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몸매 날렵한 동네 사람 뒤를 느슨하게 따라 달렸다. 달리는 것은 물처럼 그 동네에 스며드는 일이다. 술이 몸속에 스며들듯이, 내가 머문 땅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술과 세상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허 동문은 술평론가이자 막걸리학교 대표로 활동 중이다. 모교 국문학과 졸업 후 중앙대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일본주류총합연구소에서 청주제조자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저서로 ‘막걸리, 넌 누구냐?’, ‘풍경이 있는 우리술 기행, ‘조선문인기행’ 등이 있다. 네이버에 ‘허시명의 술술술’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