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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023년 9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오페라로 사치하라

신금호 성악91-98 성악가·연출가 M컬쳐스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신금호
성악91-98
성악가·연출가
M컬쳐스 대표 
 
 
캠퍼스 학생운동의 막바지 시기였던 1991년 일반고 출신으로 음악대학 성악과에 입학하던 첫날부터 나의 육감은 차량의 주차 센서처럼 빨간색 위험신호를 전두엽에서 마구 보내고 있었다. 캠퍼스 잔디밭에서 기타 치면서 놀면서 여학생들과 미팅하면서 신선놀음하려던 웅장한 계획은 펼쳐보지도 못했고, 해일처럼 밀려드는 숨 막히는 과제들과 시험에 대학 첫 학기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설상가상으로 집으로 배달된 지극히 정직하다 못해 잔인한 성적표를 받고는 미세 공황증세와 함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철 지난 영화를 보면서 지나치게 과몰입하던 자존감 바닥난 자신이 요즘도 가끔 떠오른다. 

두 번째 학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던 나는 결국 현실 도피를 위해 아무 이유 없이 휴학했고 잉여 인간의 삶을 꽤 오래 누렸다. 여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국가는 그런 잉여 남자 인간을 장기간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학기 연속 휴학하면 나라의 부름이 있다는 걸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정신을 차려보니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매일 스님들의 108배만큼 하면서 점점 건장해져 가는 나를 발견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몸 힘든 것이 마음 힘든 그것보다는 편했다고 회상한다. 

스무 살 청년이지만 심약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기에 어려움을 넘어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방법을 주로 선택하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니 그제야 숨겨져 있던 잠재력을 꺼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휴가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서울대학교에서 본부 앞마당 잔디를 일반인들에게도 오픈하고 무대를 만들어 기념 음악회를 진행한다기에 보러 갔는데, 전 음대생들이 부른 우렁찬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 나오는 개선행진곡도 있었고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발레 공연도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순서였는데,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름 돋는 전환점이었다. 무대 위의 모든 음악가가 일어나 학교가 떠나가라 부른 ‘서울대학교 교가’다. 가사도 모르는 교가인데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약간의 부작용은 음악회에 동행했던 타 대학 피아노과 여학생 앞에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얼마나 학교 자랑을 했던지, 그녀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 말고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학교의 맨홀 뚜껑에도 서울대의 로고가 찍혀 있었는데, ‘뭐 저런 데까지 학교 로고냐?’하던 내가 음악회 끝나고 나오는 길에 여기저기 널려있던 자랑스러운 맨홀 뚜껑을 보면서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전역 이후 청춘을 불태우며 연습실에서 도서관에서 후회 없는 학창 시절 유학 시절을 보내고 싶어 나대로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순리를 배웠다. 한때 포기하고 싶었던 상황에서 용기를 준 그 날의 서울대학교 야외음악회는 그 원래 목적과 의도를 넘어 한 젊은이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다. 

살면서 지치고 번 아웃이 될 때 그때의 일을 돌이켜 본다. 나와 같은 지친 영혼이 혹시 내가 만드는 바로 지금의 음악회에 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곤 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현실의 빈곤함은 못 견디면서 영혼의 빈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한 줌으로 돌아갈 몸의 사치보다 영원할 영혼의 사치에 집중하는 삶이 아름답다.
 

*신 동문은 모교 성악과 졸업 후 영국 왕립음악원 오페라 석사를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왕립음악대학원 대학원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수료했다. 유럽과 미국 등 해외 오페라단 주역 성악가로 활동하다 귀국 후 국립오페라단 등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했으며, LG아트센터 오페라 ‘사랑의 묘약’으로 연출가에 데뷔했다. 경기도 교육연수원 자문위원, 인천문화재단 예술대사, 한국문화정보원 기술자문위원을 지냈다. 저서 ‘오페라로 사치하라’를 내고 강연 활동도 펼친다. 서울시 지정 전문예술단체 M컬쳐스 대표다. www.mcultur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