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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496호 2019년 7월] 문화 나의 취미

명작동화 고서 수집 곽한영 동문

“곰돌이 푸는 원래 날씬하고 감수성 넘치는 시인”

 

명작동화 고서 모으는 곽한영 부산대 교수
 
“곰돌이 푸는 원래 날씬하고 감수성 넘치는 시인”
 
 
법교육 학자인 곽한영(사회교육92-99)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의 책장에는 의외의 책들이 꽂혀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톰 소여의 모험’, ‘빨간 머리 앤’, ‘곰돌이 푸’…. 제목은 낯익은데 책의 모습은 낯설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중반까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전후해 나온 동화의 초판본이거나 그에 가까운 옛 판본들이기 때문이다.
 
곽 동문은 올해로 5년째 서양 고전 동화의 옛 판본을 모으고 있다. 책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생애와 삽화가, 초판본이 나올 당시의 인쇄술과 시대 배경 등 동화책 한 권을 둘러싼 이야기를 깊게 파고든다. 최근엔 해박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동화책에 대한 책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창비)을 펴냈다. 바쁜 학기말, 동화 이야기로 이메일 인터뷰를 청하자 열 일을 제치고 장문의 답변을 줬다.
 
“지금까지 80권 정도 모았습니다. 소장하기보다 읽기 위한 책들이에요. 책을 모으는 것 자체보다는 책의 이야기들을 찾아보고 ‘책에 대한 책’을 쓰는 데 관심이 있어요. 되팔 생각도 없기 때문에 한없이 비싼 책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유별나게 귀하거나 값비싼 수집품이 아니지요.”
 
처음 산 책은 교환교수로 간 캐나다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키다리 아저씨’의 1912년 초판본이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에도 ‘책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사 주마’던 어머니가 사오신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그 중에서 읽고 또 읽어 삽화까지 다 외운 책이었다. ‘해적판’이나 다름없는 전집으로 접했던 책의 본 모습이 보이는 편집이 좋았다. 본래의 장정과 판형에 맞춰 제자리를 잡은 글과 그림은 작가의 의도에 가장 가까웠을 터다. 책 자체의 아름다움에도 매료됐다. 당시 책들은 책이 호사품이었던 전 시대의 영향을 받아 장정부터 디테일에 공을 들인 티가 난다.
 
그때부터 벼룩시장과 리사이클링 숍, 온라인 경매 사이트를 통해 책을 사모으고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렵게 손에 넣은 책도 많지만 모셔두기만 하지 않는다. 다른 책들처럼 책장에 꽂아두고 틈틈이 읽고, 책 강의를 할 때는 청중들이 책을 만지고 책장도 넘겨보게 한다. “책은 사람들에게 읽힐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지론이다. “100년 넘은 ‘로빈슨 크루소’를 갖고 있는데 완전히 파본에 가깝습니다. 그거야말로 가장 ‘로빈슨 크루소’다운 모습이죠. 앞서 꼬마 주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읽어댔으니 당연해요. 그렇게 재밌는 책을 어떻게 안 읽고 모셔두기만 하겠어요.”
 

빨간머리 앤 1914년판



동화의 원전을 파고든 그의 눈엔 대다수가 알지 못하는 동화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곰돌이 푸’는 원래 몸매가 상당히 날씬해요. 귀여움을 강조하다 보니 지금의 배 나오고 살찐 모습이 됐죠. 외모 변화보다 더 아쉬운 건 여백이 많고, 시와 노래로 가득한 감수성 넘치는 시인으로 묘사됐던 푸가 디즈니 만화에서 귀엽고 약간 맹한 아기곰으로만 보인다는 거예요. 푸를 좋아하신다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해 보셨으면 해요.”
 
최근 그는 책과 관련된 다른 책을 구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얼마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출간 되기 전 게재된 1952년 9월판 ‘LIFE’지를 구했습니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가 1880년대 연재된 ‘Boy's Own’지 영인본도 구했는데 초판본 책과 내용, 삽화가 또 달라서 놀랐어요. 원래 소설이 놓여 있던 맥락을 보게 돼서 흥미로웠죠.”
 
책과 관련된 강연을 하면서 그는 “이런 강연이 가능한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명작 동화를 읽으며 자라나는 세대는 사라져 가지만 책이 일종의 ‘명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김소월, 윤동주 등 옛 시집 초판본 복각 열풍이 불었다. “책이 정보전달 수단보다 ‘물건’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 같아요. LP가 MP3 음악이 주지 못하는 ‘실물성’을 주기 때문에 각광받는 것과 비슷하죠. 그런데 ‘실물성’에 ‘진본성’이 더해질 때 비로소 물건으로서 책의 가치가 커지는 거거든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더해지는, 이거야말로 ‘진짜’라는 느낌이랄까요. ”
 
대량 출판이 드물던 시기 한 권 한 권 정성 들여 엮은 책을 손에서 손으로 넘겨 받은 그는 책의 물성이 주는 힘을 믿는다. 책을 모으고, 알리고, 직접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게임의 法칙’ 등 법교육 관련 책 다수와 고서에 관한 책을 썼고 앞으로도 계속 펴낼 예정이다.

“가까운 주말에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손에 잡히는 실물로서 책을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한 장 한 장 마음 속에 쌓이는 페이지들이 내 삶을 ‘진짜’로 느끼게 해주는 감동적인 경험, 어린 날의 경이로운 기억들을 꼭 떠올려보셨으면 해요. 책은 참 좋은 물건입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