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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2019년 3월] 기고 에세이

인생의 최고 시기는 정년 뒤

서진호 농생명공학부 교수 정년식 대표연설
교수 칼럼

인생의 최고 시기는 정년 뒤


서진호
화학공학72-76 
농생명공학부 교수  


저에게 정년은 마라톤을 완주한 느낌입니다. 희열과 즐거움이 있었고, 어려움과 난관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극복하고 종착점에 도달했습니다. 완주의 뿌듯함, 안도감과 함께 다가올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가 고속성장을 하면서, 교육과 연구 여건이 좋아지는 시기에 특히 서울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고 행운이었습니다. 훌륭한 동료 교수, 우수한 학생, 성실한 교직원, 그리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캠퍼스. 모든 것이 서울대였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등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디지털 시대의 적응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또한 투고한 논문이 게재될지, 신청한 연구과제가 지원을 받을지, 우수한 학생이 우리 연구실로 올지, 졸업하는 학생이 취업은 잘될지 등등, 노심초사하면서 지내온 시간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연구비를 규정대로 잘 사용했는지, 논문 표절을 하지 않았는지,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았는지, 학생들에게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닌지, 꼰대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지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게 정년 후의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적의(適意)’라는 단어처럼, ‘마음 가는 대로’ 지낼 수 있게 됐습니다.

저와 서울대의 귀한 인연은 제가 1972년 공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90년 농생대 식품공학과의 교수 부임 이후 다시 서울대의 가족이 됐습니다. 공릉캠퍼스, 수원캠퍼스를 거쳐 관악캠퍼스에서 정년을 합니다. 수원에 있었던 농·수의대 식구들의 관악캠퍼스 이전을 도와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년을 하면서 서울대 구성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당부의 말씀은 ‘서울대 가족 모두 화합과 조화 속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울대 발전의 밑거름으로 승화할 수 있는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교수와 학생 사이가 미풍양속의 사제지간이 아니고 갑과 을의 관계로 변질되어 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유학시절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대학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30여 분 떨어진 패서디나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겨울철에도 눈이 오지 않는 지역인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총장 공관 앞에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연인즉, 학생들이 1,700미터 높이의 ‘마운트 윌슨’에서 픽업트럭으로 눈을 실어 와서 총장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눈사람을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지위는 강압적 권력이라고 여겼던 당시의 저에게 ‘진심어린 존경의 대상이 될 수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어, 눈사람 선물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면서 부러움이었습니다. 우리도 곧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사제지간의 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늙음에 대한 푸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최고 시기는 정년 후”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용기를 얻어, “제 안에서 익어가는 부분”을 활용하여 제2의 인생을 멋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서울대가 오세정 총장의 리더십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혁신을 위한 용기와 추진력으로 서울대가 새로운 도약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믿기에,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학교를 떠납니다. 서울대가 구성원이 자부심을 느끼는 대학, 국민이 자랑스러워하는 대학, 세계가 존경하는 대학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칼럼은 교수정년식 대표연설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