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86호 2018년 9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평생 못 벗어날 아버지의 후광, 그런데 자랑스러워요”

고 피천득 선생 차남 피수영 하나로의료재단 경영고문
고 피천득 선생 차남 피수영 하나로의료재단 경영고문 

“평생 못 벗어날 아버지의 후광, 그런데 자랑스러워요”

피수영 동문(왼쪽)이 그의 부친 고 피천득 선생의 좌상 옆에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


“의사는 아무리 유명해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지지만, 문인(文人)은 좋은 글을 남겨 세상을 떠난 뒤에도 후세에 이름을 전하지요. 저는 74년 동안 살아온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언젠가 눈 감는 그날까지도 아버지의 후광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평생 벗어나지 못할 그 후광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8월 29일 피천득 선생 좌상 앞에서 만난 그의 차남 피수영(의학61-67) 하나로의료재단 경영고문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서울 서초구 동작역부터 고속터미널역 부근까지 약 1.7㎞ 거리의 반포천변에 ‘피천득 산책로’가 조성됐다. 산책로 곳곳엔 선생의 시 또는 문장이 새겨진 벤치와 비(碑)가 설치됐으며, 실제 크기의 피천득 선생 좌상이 산책하는 이들을 맞는다. 이보다 앞서 지난 5월엔 선생의 시집과 수필집이 전면 개정돼 재출간됐다. 시집은 ‘창밖은 오월인데’로 제목을 바꾸고 미발표 시 7편을 더 실었으며, 수필집 ‘인연’엔 고 박완서(국문50입) 작가의 추모글과 미수록 산문 2편 등이 추가됐다. 시집이 3개월 만에 3쇄를 찍는 출판시장의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필가이자 시인이며 영문학자였던 고 피천득 선생이 모교 교수로서 오랫동안 봉직해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영면 11주기를 맞은 그가 이처럼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 밑바탕에는 피수영 동문을 비롯한 서울대 동문들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2015년 지금은 돌아가신 석경징(영어교육60졸) 모교 영문과 명예교수가 주축이 되어 금아피천득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출범했습니다. 아버지 생신과 서거일이 같이 있는 5월엔 학술세미나와 청소년을 위한 문학 프로그램을 개최했고 10·11월엔 일주일에 한 시간씩 6주 동안 ‘피천득 다시 읽기’ 강연회를 열어왔어요. 10주기를 맞은 지난해 변주선(영어교육60-64 대림성모병원 행정원장·본회 명예부회장) 동문이 2대 사업회장을 맡으면서 이번 산책로 조성에 많은 기여를 했지요.”

국내 신생아학 개척한 명의
부친 수필집에 추모글도 써

기념사업회의 산책로 조성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조은희(대학원84-87) 서초구청장 또한 모교 동문이다. 지역 문화예술인이 드문 서초구의 입장에서도 피천득 선생의 이름을 딴 산책로 조성은 다소 삭막한 구의 이미지에 선생의 순박한 이미지를 불어넣어 보다 정감 있는 문화도시로 거듭나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1980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가 이 산책로 인근 아파트에 사실 때 제가 자주 찾아뵀습니다. 헬스장에서 같이 운동도 하고 운동 후 샤워하실 땐 등도 밀어드렸죠. 건너 건너서 듣기로 이를 지켜보던 한 어르신이 ‘저 노인은 얼마나 재산이 많길래 아들이 저렇게 정성껏 때를 밀어주나’ 생각했더랍니다. 아버지도 저도 한참 웃었죠.”

피수영 동문은 모교 졸업 후 의사 생활을 시작해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퇴임할 때까지 1만명이 넘는 미숙아를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2000년엔 468g의 초미숙아를 살려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릴 적 자신을 진료해줬던 고 이국주 모교 의대 교수와의 인연으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홍창의(의학45-47) 모교 의대 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신생아학을 연구했다. 미국의 신생아 전문 간호사들을 초청해 한국인 간호사 50여 명을 교육받게 했다. 피 동문은 국내 신생아학을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 명의로 꼽힌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辨)’에서 ‘피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며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한 그 아이가 당시 22세 의대생 피수영 동문이다.

“수필엔 여동생인 딸이 자주 등장하지만 아버지는 저하고 더 각별했어요. 평생 아빠라고 불렀고 반말을 썼죠. 영어에 존댓말이 없다고 해서 존경심과 애정을 표현 못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제 마음이 깊고 진실하다는 증거일 겁니다.”

인터뷰 장소에서 봤던 피천득 선생의 좌상도 일부는 피 동문이 만들었다. 전문 조각가가 1,000장 넘는 사진을 찍어갔지만 제작 중간에 보여준 동상이 영 아버지 같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서 웃통을 벗고 작품에 달려든 피 동문은 반나절 동안 꼼짝 않고 서서  아버지의 얼굴을 다듬었다. 개정판 수필집엔 직접 추모글도 썼다. “요즘 즐길 것들이 너무 많지요. 영화, TV, 컴퓨터, 게임 등등. 이런 때일수록 독서의 즐거움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해요. 동문들의 책장에서 아버지의 시집이나 수필집이 더 자주 꺼내어지길 소망해봅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