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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018년 7월] 문화 신간안내

화제의 책: '내면기행' 묘비를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저

화제의 책

묘비를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



내면기행
민음사·25,000원
심경호 (국문75-79)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최근 작고한 김종필(경성사범46입) 전 국무총리의 묘비명이 화제다.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악함이 없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없다)’ ‘소이부답(笑而不答·웃으며 답하지 않는다)’, ‘년구십 이지팔십구비(九十, 而知八十九非·아흔 살을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됨을 알았다)’ 등을 생전에 써 놓았다고 한다.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짓는 전통은 동양에서 20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의 현자들은 간단하게 달관한 것이 아니다. 죽음 뒤의 구원보다 죽음 자체에 직면했기에, 그 공허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사생(死生)의 의미를 깊이 성찰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을 던진 글쓰기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묘비를 미리 짓는 자찬묘비다. 자찬묘비·묘지 연구의 권위자인 심경호(국문75-79)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름 없는 선비에서 이황·정약용·서유구 등 한국의 근대 이전 지식인들이 남긴 58편의 묘지명을 한 편씩 읽으며 옛사람의 내면세계를 탐사한다.

한문학 연구의 기초를 수립한 ‘한국 한문기초학사’(전 3권)에서 동양 고전의 정수를 풀이한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논어’(전 3권), 명나라 말의 문호 원굉도의 전집을 한중일 최초로 역주한 ‘역주 원중랑집’(전 10권)까지 저자의 저·역서는 70여 종을 헤아린다. 그중에서도 이 책 ‘내면기행’은 주저로 꼽히는 ‘기행’ 연작의 첫째 권으로, 2010년 우호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 출간을 앞두고 10년 만에 펴내는 개정증보판에는 학문의 원숙기에 접어든 저자의 공력이 온축되어 있다.

김시습이라는 비범한 개인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한 ‘김시습 평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심 동문은 역사 인물을 서술하는 방법론에 오래 천착해 왔다. 사적의 나열에 그치지도, 픽션에 빠지지도 않기 위해 객관적 검증과 주관적 논평을 종합하는 평전 서술의 예를 보여 주는 ‘내면기행’은 곧 58편의 자찬묘비·묘지와 함께 읽는 58인의 인물 열전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작가의 생년 기준으로 연대순 배치해 고려에서 조선 말까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을 하고 어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심 동문은 “선인들은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했다”며 “죽음이 가져다줄 통절한 아픔과 슬픔을 가상으로 체험함으로써 죽음의 보편성을 배우고, 고독 속에서 홀로 겪게 될 죽음의 순간에 느낄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고 죽음의 절박함을 알았기에 삶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맛보고자 했다”고 말한다.

권 기, 유명천, 유정주, 전 우, 유원성 등의 자찬묘비가 새로 소개되며, 근세 이전 자서전적 글쓰기의 흐름에 대해 서술한 보론은 저자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민음사에서 새로 선보이는 본문 디자인은 독서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서체의 크기와 판면을 세심하게 만들었으며 침상에서나 여행길에서나 동반할 수 있도록 간소하게 장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