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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호 2017년 11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싸움의 한 방법

도진기 추리소설가·변호사

싸움의 한 방법



도진기(사법86-90) 소설가·변호사



싸움으로 일생을 보내버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정치나 이데올로기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적인 손익에서 비롯한 법정 다툼으로 시작해 한 평생을 상대와, 또 사법기관과 다투다가 보내는 경우가 가끔 있다.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다. 물론 당사자로서야 얼마나 울분에 차고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생산적인 일에 여생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신경을 덜 끓이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주제넘게 들기도 한다. 조금 뜬금없지만 이런 예를 한 번 보자.

여성 3인조 밴드 딕시 칙스(Dixie Chicks)는 미국의 장윤정이었다. 컨트리뮤직은 미국의 성인층이 사랑하는, 한국의 트로트 같은 위치를 가진 음악이다. ‘Wide open spaces’ 앨범은 빌보드 컨트리 앨범 차트에서 3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장르에서 젊은 여성들이 폭발적 인기를 얻은 것 자체가 이례적 현상이었고, 그만큼 더 인기도 뜨거웠다. 승승장구하던 이들은 돌부리를 만난다.

이라크 전쟁이 막 벌어지려던 2003년이었다. 런던 공연 도중, 그룹의 싱어인 나탈리 메인즈가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게 부끄럽다”는 말을 해버렸다. 이 말이 고국에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미 전역이 뒤집혔다. 대중은 거센 비난을 쏟아 부었다. 남부지역 라디오DJ들은 이들의 음악을 보이콧했다. 컨트리 음악의 고향인 미국 남부는 보수성이 강하다. 그들의 음악을 하는 밴드가 그들의 정서에 반하는 발언을 했으니, 더 배신감을 느낀 거였다. ‘입 닥치고 노래나 해’, 심지어는 ‘죽이겠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콘서트, 앨범 판매는 곤두박질쳤고, 여론의 광풍 앞에 밴드의 인기는 양동이 물을 부은 촛불마냥 허무하게 꺼져버렸다. 절정의 시기 바로 뒤에 온 추락이라 더 절망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완전히 퇴장한 줄 알았던 이들이 돌연 신곡을 발표했다. “아직 화해할 준비가 안 됐어(I’m not ready to make nice)라는 제목의 이 곡에는 발언 논란 당시의 심정과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다. “용서? 듣기는 좋지. 잊어? 그럴 수 있을까…난 아직 화해할 준비가 안 됐어. 난 물러설 준비가 안 됐어…엄마가 딸에게 낯선 사람을 증오하도록 가르친다면 슬픈 일이지”라고 읊은 이 곡은 선풍적인 화제를 몰며 그래미상을 휩쓸었다. 명성만으로 따지면 이전의 컨트리 곡보다 더 큰 성공을 이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셧업 앤 싱’이라는 자전적 영화에도 출연했다. 입 닥치고 노래나 하라던 협박편지 문구를 그대로 갖다 쓴 제목이었다.

말 한 마디로 촉발된 마녀사냥에는 비판적인 생각이 우선 든다. 이런 놀음은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그 다음으로는 딕시 칙스가 그 후에 보인 대응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은 직선적 투쟁으로 맞서지 않았다. 이를테면 고소, 고발 같은 법정싸움. 아마 그들에게 법적 대응을 하라고 부추긴 모사꾼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적에게 조금 상처를 입히는 대신 자신은 파멸했을지도 모른다. 강경한 대응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실체 없이 흩어지는 연기 같은 대중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들은 좌절하거나 대중 예술계에 진절머리를 내고서 퇴장해버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 음악으로 그들이 받은 상처를 승화하고 치료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자신들을 모욕한 이들이 보낸 문구를 영화의 제목으로 쓴 부분은 역설적 유머의 절정이다. 내겐 가장 세련된 복수로 보인다.





*도 동문은 추리소설가이자 변호사로서 모교 법과대학과 동대학원 졸업 후 부장판사를 역임했다. 2010년 '선택' 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이후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붉은 집 살인사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 한국추리문학대상을 수상한 '유다의 별', 인물 '진구'가 주인공인 시리즈 '순서의 문제', '나를 아는 남자', '가족의 탄생' 등을 펴냈으며 기발한 트릭과 지적 게임이 돋보이는 본격 미스터리로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호평을 받았다. 도 동문의 작품 가운데 일부는국에 수출된 한편 영화 및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