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호 2017년 7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24년 만에 외치는 ‘죽일 테면 죽여봐’
하지현 동문 칼럼
24년 만에 외치는 ‘죽일 테면 죽여봐’
하지현(
의학88-93)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칼럼니스트때는 1992년 겨울, 녹두거리의 한 술집이었다. 본과 4학년이던 나는 국가고시 준비를 핑계로 관악 도서관으로 출근해 있다가 홍기빈(경제87-93), 김수연(화학공학87-92)과 밤마다 술마시며 떠드는 날이 지속되었다. 나와 김수연은 민요연구회 아리랑, 홍기빈은 총연극회로 여러 공연을 했었고, 다들 학교를 떠날 시기였다. 수다는 자연스레 “우리 뭐 재미있는 걸 해볼까?”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그때까지 학생들의 공연은 80년대 사회상을 반영해서 정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전통연희나 집체극이란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형식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단결을, 사회의 변혁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우리도 꽤나 만들었었다. 이런 부분에 의문을 갖고 집단이 아닌 개인의 진짜 고민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얻은 결론은,
“정해진 길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안전한 정답일까?”
그때만 해도 학부를 졸업하면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고, 아니면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 후에 교직을 지망하거나, 고시 준비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하면 얼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사회에 기회가 많았기 때문인데, 오직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의 결과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믿고 싶은 것일 뿐,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걸 얻는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징후도 발견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겨우내 이야기를 만들었고 내가 극본을 썼다. 관객의 부담을 낮추기 위해 형식면에서 생소했던 뮤지컬로 만들기로 했다. 음악적 조예가 깊던 홍기빈이 작곡을 맡았고, 한양레퍼토리에서 조연출을 하고 있던 김수연이 연출을 하기로 했다. 이제 몸통이 필요한 시점, 경영대 연극반 후배들에게 제안해 함께 공연을 하기로 하고, 덜컥 문화관 대강당을 대관을 했다.
내용은 탄탄대로를 달리던 광수가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러 가던 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정산소라는 사후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옛 여자친구 명화를 만나서 그녀의 사랑을 얻는 욕망전차게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그를 지켜보는 자학이라는 반복적으로 자살을 하는 아나키스트적 인물을 배치해서 광수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도록 했다.
문화관 대강당은 너무나 커서 연극공연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우리는 무대 위에 단을 쌓아 객석을 만들어 아담한 소극장 분위기가 나게 만들었고, 더욱 대담하게 2,000원이나 받는 유료공연으로 문을 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3년 4월 다섯 차례 공연은 성황리에 이루어졌고, 관악 최초의 성공한 뮤지컬이란 뿌듯함을 가진 채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그렇게 24년이 흐른 올해 초, 기획을 했던 장의정(경영89-94)의 전화를 받았다. ‘죽일 테면 죽여봐’를 다시 공연하게 되었다고. 묻혀있던 극본과 공연 영상을 잊지 않고 있다가 투자를 받아서 제대로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올해 5월 18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유명한 배우 홍경인 주연으로 프로 배우들에 의해 ‘죽일 테면 죽여봐’는 24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무대에 올려졌다.
24년전 서울대 학생들의 고민이 지금은 이 나라를 사는 대부분의 청년들의 고민으로 확대된 것임을 객석의 반응을 보며 확인할 수 있었다. 개막일에 나타난 경영대 후배들은 20대 초반 앳된 모습에서 어느덧 사십대 중반의 머리 벗겨지고 배나온 아저씨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도 무대에서 공연하느라 정작 본인은 보지 못했던 공연을 프로 배우들의 연기로 보는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세월은 흘러도 문제의식은 여전하고, 당시의 파격은 지금의 현재성을 갖고 있었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라는 심심한 몸부림이 시대를 관통하는 꽤 괜찮은 창작 뮤지컬 한 편을 세상에 내놓은 셈이다.
*하 동문은 모교 의과대학 졸업 후 모교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했으며 현재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가르치고 진료하고 있다.
'글 잘쓰는 의사'로도 알려진 그는 진료실 밖에서도 강연과 저서를 통해 현대인의 심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대중에 알려왔다. 모교 재학 시절 서울대 첫 뮤지컬이자 유료 공연인 '죽일 테면 죽여봐' 극본을 쓰기도 했다. 저서로 '도시 심리학', '심야 치유 식당',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등에 이어 최근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 '지금 독립하는 중입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