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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017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겸재, 추사, 불상 연구하며 식민사관 넘어섰지요”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겸재, 추사, 불상 연구하며 식민사관 넘어섰지요”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석굴암…. 이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최완수(사학61-65)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을 통해 처음 그 가치가 세상에 알려진 문화유산이라는 것. 최 동문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예술품을 통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데 평생을 헌신해 왔다. 500년 조선왕조사가 새롭게 조명 받는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재야에서 강단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 동문은 최근 ‘추사명품’이라는 책을 펴냈다. ‘겸재정선’이 겸재 연구의 완결판이라면 ‘추사명품’은 추사 연구의 완성판이다. 5월 23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고풍스러운 건물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니 새하얀 한복을 입은 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언제 지어진 건물인가요.
“1938년입니다.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용 선생 작품이에요. 물이 새면 막는 수리만 하고 당시 그대로입니다.”


-늘 한복을 입으세요.
“네. 오늘은 손님을 맞는 날이라 격식을 갖춰 입었고요.”


-독신이라 들었는데, 옷 관리하기 쉽지 않아 보여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제가 할 때도 있고 가끔 제자들도 도와줘요. 대부분 세탁소에 맡깁니다.”


-댁은 어디세요.
“인왕산 아래 살아요. 여기 있을 때가 더 많지요.”


-외롭지 않으세요.
“그럴 틈이 없었어요.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까….”


-집필한 책이 30권이 넘죠.
“아마 그럴 거예요.”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천착하게 된 동기가 있으세요.
“10살 때 일이에요. 할머니를 따라 보덕사에 갔다 불상을 처음 봤어요. 황금빛의 미남이 무척 아름다운데, 머리 모양이 소라껍질 붙여놓은 것처럼 이상해요. ‘할머니, 머리가 왜 저 모양이에요.’ ‘낸들 아냐 궁금하면 저기 스님에게 여쭤봐라’ 해서 물었더니 당황하는 기색이에요. 보리수 열매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린 제가 듣기에도 좀 아니다 싶었죠. 궁금증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죠. 제 성정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어요. 예쁜 꽃을 발견하면 집에 옮겨와 심을 정도였죠.


나중에 정리한 개념이지만 식물로 비유하자면 이념은 뿌리고 예술은 꽃입니다. 튼실한 뿌리에서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그러나 뿌리는 보이지 않죠. 꽃을 보고 유추할 따름입니다. 이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예술은 실체가 있으니 확실합니다. 해서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요. 그럼 왜 우리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거냐?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4, 5살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분들이 술자리에서 ‘왜놈들이 왜곡시킨 우리 역사를 후손들이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데…’ 하시며 한탄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의 뛰어난 예술작품의 가치를 밝혀 폄훼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소명의식이 이른 나이에 생겼지요.”


-사학과 진학은 운명이었네요.
“경복고등학교 재학 당시 담임선생님이 당대 최고 한학자셨던 백아 김창현 선생님이셨어요. 이 분을 통해 한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어요. 서울대 사학과는 당연한 코스였어요. 입학할 때 선생님이 사학과 제자들에게 좋은 후배 가니까 잘 살펴달라고 하시기도 하셨죠.”


-학자가 되길 원하셨는데 석·박사 과정을 밟지 않으셨죠.
“학교에 남아 있으면 식민사관 극복은 오히려 더 불가능해 보였어요. 당시 주류 사관으로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그것을 따랐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불가능했죠. 이태진, 정옥자 등 동기들과 문제의식을 갖고 우리끼리는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부했지만요. 식민사관이 이론적으로 탄탄해서 맞대응하기엔 너무 지난한 과정이 될 것 같았어요. 독자 연구의 길을 택했죠.”


-첫 직장이 국립중앙박물관이었죠.
“불상 연구를 통해 우리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고 국립박물관에 들어갔습니다. 불상 연구 바탕에는 불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란 생각이 들어 대정신수대장경을 찾았습니다. 고려대장경을 기본으로 일본에서 정리한 불경인데 이해하기 쉬웠어요. 국립박물관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없어요. 실제 불상부터 조사해야겠다 싶어 국립박물관 경주, 공주, 부여 분원 등을 자원해서 내려갔죠.”


-간송미술관에는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경주 분원에서 일할 때예요. 낭산 선덕사 터에 묻혀있는 보살상 입상을 조사하고 있는데 잘 생긴 중년 남자가 찾아왔어요. 조사할 때는 누가 온지도 몰랐죠. 구경나온 사람인가 했죠. 그런데 오랫동안 그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아요. 관심이 많은 사람이군 하고 뒤돌아 봤더니 빙긋이 웃으며 최순우야 그러더군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셨는데, 그때까지도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어리둥절해 하니까 자기소개를 하시며 저녁에 본인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아차차 내가 실례를 범했구나 싶어 꾸벅 절을 하고 저녁에 찾아갔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신라오악 역사유적 조사가 이뤄졌는데 최순우, 황수영, 김원룡, 진홍섭 선생님이 팀이 돼 경주에 오셨어요. 이후 선생님께서 국립박물관 미술과로 이끄셨고 선생님이 간송미술관 민족미술연구소 초대소장으로 가시면서 같이 하게 됐죠. 결정적으로 간송미술관을 택한 계기는 사전 답사를 갔다 책장에 꽂힌 깨끗한 대정신수대장경을 보고 나서입니다. 10년간 저 불경만 읽어도 손해 보는 것은 아니겠다 싶었죠. 그렇게 와 50여 년을 여기서 보내고 있습니다.”


-겸재, 추사와의 만남도 간송미술관 와서 이뤄졌죠.
“그렇죠. 미술관에 이 분들의 작품이 많았어요. 초기에는 불상 연구로 논문을 썼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목표였으니까요. 불상의 시원양식을 연구하며 한국 불상의 우수성, 독창성을 밝혔죠. 불상의 머리 형상에 대한 비밀도 풀었는데, 당시 불상이 출현했던 지역의 상투 모양이 변화해서 그렇게 된 것을 알아냈지요. 지금 보면 구닥다리지만 당시로는 논문 형태를 갖춘 미술사 논문이 없을 때라 반응이 대단했죠. 삼불 선생님이 그렇게 공부 많이 하고 있을지 몰랐다고 엽서 주시고, 여러 선생님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격려해 주셨어요. 신바람이 났죠.

이후 대중을 위해서 연구소에서 뭘 하는지 보여줘야 할 테니 자료 정리만 할 게 아니라 전시회를 통해 작품도 보여주고 매 회 팸플릿에 논문도 싣자고 했죠. 1년에 두 번 전시회를 열기로 하고 첫 전시가 겸재 정선이었어요. 겸재 정선이면 조선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이에 대한 논문은 최순우 선생님이 쓰셨고요. 2회는 추사로 하기로 했는데, 논문 써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2회 만에 원칙을 중단시킬 수는 없어서 연속 전시라는 꼼수를 동원해 제가 추사 논문을 써서 시기로는 3회 전시 팸플릿에 실었죠. 그때 쓴 논문을 보고 제가 60세 넘은 사람인줄 알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서른 무렵인데, 젊은 사람이 추사의 금석학에 대해 썼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 하셨지요. 이후 겸재, 추사 연구에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겸재, 추사를 연구하며 발견한 위대성은 무엇이죠.
“겸재와 추사 모두 조선후기 문화절정기를 장식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추사는 조선후기 사회가 멸망기로 접어드는 내리막길이었던 시대를 살았죠. 다시 말해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시기, 즉 진경문화를 일으켰던 조선 성리학 시대를 청산하고 새 사회를 열어야 하는 시기, 새로운 이념의 시대를 열어야 할 당대의 기수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반면 겸재는 진경문화의 절정을 열어간 주인공이고요. 진경시대는 청나라를 라이벌로, 심지어 오랑캐로 여겼어요. 그러면서 조선이 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창안했습니다.


겸재는 추사의 고조부 세대 사람입니다. 충분히 바뀔 만할 시간이죠. 문화란 파도와 같이 늘 변합니다. 문화가 발전했다고 끝없이 지속되는 건 아닌 것처럼, 왕조가 바뀌는 것 역시 문화가 기멸(起滅)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죠. 늘 하는 얘기지만, 내가 역사를 통괄해 보니까 그 기간이 대체로 250년 정도 되더군요. 중국이나 일본은 그 기간에 딱 맞게 왕조가 바뀌었는데 우리 조선만 500년 동안 유지됐어요. 우리 선조가 중국문화에 현명히 대처하고 대응, 대항하면서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지켜온 거죠. 조선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중국이 문화적으로 앞선 선진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로 충분히 소화하면서 250년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화되거나 따라가지 않고 심화 발전시켜 우리 것을 만들었지요.

이렇게 조선은 중국 것을 우리 것으로 완성시켜 다시 250년을 살아온 거죠. 성공적인 후기 문화란 항상 ‘고유성’, ‘독자성’, ‘완결성’을 보여줍니다. 조선후기 완결성의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진경산수와 풍속화고, 서예에서도 그 완결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추사의 추사체입니다.”



“그래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 없어”
이념은 뿌리 예술은 꽃…학자들의 스승으로


-우리 옛 작품들이 해외서도 인정을 받으려면 선생님 책이 번역돼야 할 텐데요.
“‘겸재정선’은 요약해서 번역이 됐어요. 위트필드란 분이 영어로 번역을 했어요. 추사에 대해서는 제 책이 아니더라도 짧게 번역된 것들은 많은 것으로 알아요. 우리 옛 선조들의 작품이 해외서도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 국력이 신장돼야 할 겁니다.”


-선생님이 길러낸 간송학파의 위상이 대단해요.
“간송학파란 앞서 얘기한 사관(史觀)에 입각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관으로 평가하자는 겁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술해놨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슬픈 민족이고, 비참한 민족이고, 정체된 민족이라고 기술해놨어요. 그렇다고 일본사람들이 사료 자체를 날조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여태껏 그 논리에 꼼짝 못하고 끌려 다닌 거죠. 사료를 날조했으면 날조했다고 따질 텐데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좋은 시기일수록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냉철하게 자기를 반성하는 기록을 남겨놓습니다. 개인도 그렇잖아요. 건전할 때 자기에게 스스로 비판을 가해요. 하지만 망조(亡兆)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태평성대라고 해요. 망조를 이끄는 주역들이 만든 기록이니까, 이때가 좋은 시대라고 기록을 남겨요. 그래서 사실은 양당(兩黨) 이상이 존재할 때가 이상정치 시대예요. 내가 주장하는 진경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죠.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시기란 말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그때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당쟁 당사자들이 기록해놨어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일제가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조선은 당쟁 하다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만 정작 당쟁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당쟁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절정기를 맞은 거죠. 이건 현재도 아주 간단한 상식이에요. 양당 이상의 당이 존재하며 서로 견제하면서 이상정치가 이뤄진단 말입니다. 일당 독재를 할 때는 견제세력이 없으니 자화자찬을 합니다. 일당 독재는 망하는 길이에요. 조선도 척족 세도가가 등장해 독재를 하면서 태평성대라고 기록돼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은 한정 없이 도탄에 빠져 힘들었어요. 이런 잘못된 역사관을, 그걸 밝히는 게 간송학파의 학맥이고 경향입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4차 혁명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받아들이고 자기화 하는 데는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서구 과학문명도 결국 겸재나 추사 같은 분이 나와서 우리가 융합해 대단원의 막을 내릴 거라 생각해요. 해양문화와 대륙문화가 충돌하는 한반도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융합하고 자기화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식민사관은 극복됐다고 보세요.
“아니요. 지금도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고 형편없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경시대에 대해서도 부정하죠. 제 나라 역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말이죠.”


-못다 한 연구가 있으신지.
“왕릉조사 해놓은 게 있는데, 내 건강이 그걸 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미술사로 우리 문화 우수성을 증명하려니 확고한 증거물이 필요해요. 불상은 언제 어떻게 조성했다는 연대가 정확한 게 많지 않아요. 석굴암도 정확한 제작 연도를 모르죠. 정확한 조성 연대가 밝혀진, 기념명을 가진 미술사 자료가 뭐가 있을까 찾다보니 왕릉이 있어요. 왕릉을 조사하면 내가 추론했던 사관이 확고해 질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1세대 제자들부터 끌고 왕릉 조사를 시작했어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조사과정에서 내 추론이 확실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죠. 미비한 점을 보완하고 발표 시기를 저울하다 보니 논문 발표를 하지 못했어요. 다행히 제자 중에 왕릉을 전공하는 사람이 나와서 내가 하다 못 하고 가면 이어 할 거라 믿어요.”


김남주 기자





최완수 소장은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가헌(嘉軒). 백아 김창현, 동빈 김상기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모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을 거쳐 1966년 4월부터 간송미술관에서 근무하며 연구실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제10회 일민문화상(2012), 제21회 위암장지연상 한국학부문(2010), 우현학술상 미술사분야(2010)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추사집’,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2’,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겸재의 한양진경’, ‘겸재정선’, ‘추사명품’ 등이 있다. 조선 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며 늘 한복을 입고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국내서 학문의 진전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해외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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