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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2017년 5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차를 마시며 시를 읽다

김후란 시인 ‘내게 가장 소중한 한 권의 책’
동숭로에서

차를 마시며 시를 읽다

김후란 (가정교육53입) 

시인·문학의 집 서울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언젠가 문학인들이 ‘내게 가장 소중한 한 권의 책’을 출품한 특별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다.
나는 박두진 시집 ‘해’ 초간본 (1949년 청연사 발행 380원)을 출품하였다. 책더미 속에 사는 내가 특별히 이 책을 고른 데는 나의 문학소녀 시절 그리운 추억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교실에 들어선 국어선생님이 한 권의 시집을 들어 보이면서 “좋은 시집이 나왔는데 오늘 서점에 가서 한 권씩 사기 바란다. 박두진 시인의 ‘해’라는 시집이다.” 하시고는 그중의 한 편을 크게 낭송해 들려주셨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나는 그 시를 들으면서 가슴이 막 뛰었다. 참 좋았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귀가할 때 서점으로 직행, ‘해’를 샀다. 내가 산 첫 번째 시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흉내라도 내듯이 소리 내어 낭송했다. 시를 계속 읽다보니 바다처럼 광활한 무한영역의 세계를 가진 시의 크기와 깊이에 심취하게 되었고 시를 소리 내어 낭송하는 동안에 가슴에 밀려드는 율조에 취하는 행복감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저녁식사 후 시 ‘해’를 비롯, ‘청산도’ ‘향연’등을 암송하여 가족들을 즐겁게 했다.

다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물으셨다. “너희들 박두진 시집 산 사람 손들어 봐라” 내가 손을 들었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 혼자 칭찬을 듣고 쑥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점이 6·25 전쟁 부산 피난시절이어서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암담한 나날이었기에 ‘해’라는 시 한편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의 돛을 올리는 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 보석 같은 시인들의 작품세계와 인간을 시로 그리는 ‘별들의 노래’ 연작시를 쓰고 있는데 그중에 박두진 시인을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노래하였다.

대쪽같은 성격/ 결곡한 의지로/ 한평생 자존의 길 지키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희망의 햇덩이 안겨주어/ 방황하는 이 쓰러지는 이/ 볕바른 양지로 이끌었다// 시인의 한편의 시로/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시인은 가도 그 목소리/ 여전히 이산 저산 메아리지고.


전쟁의 참담함이 인간세계를 얼마나 끔찍하게 짓밟는지를 몸소 겪은 세대들은 안온한 일상생활이야말로 인간의 최대 행복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많이 바쁘고 많이 힘들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근래의 시대적 고통을 겪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갈등을 겪는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겐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중국의 석학 임어당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 차를 마시면 이속(離俗)이 되고 둘이서 마시면 한적(閑適)이라 일컬어지며 여럿이 함께 마시면 유쾌하다’. 과연 혼자서 조용히 다향(茶香)을 즐기며 창밖에 피어난 봄꽃과 연록색으로 물든 자연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그립지 아니한가.

예술이 가난을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위로는 할 수 있다는 말처럼 시집을 펼쳐들고 차 한잔을 즐기는 마음의 여유도 갖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