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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2017년 5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느티나무 광장 'Korea passing'

정연욱 본지 논설위원 칼럼
느티나무 광장

Korea passing

정연욱 공법85-89 채널A 보도본부 부본부장·본지 논설위원




한반도 주변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북핵에 대한 선제타격 가능성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고, 중국도 이 정도는 묵인할 듯한 반응을 내놓고 있다. 과거 북핵 사태 때와 비교하면 중국의 기류 변화가 확연해졌다.

중국의 관영매체들은 금기시됐던 대북 원유 지원까지 문제 삼을 태세다. 북한의 도발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다. 상황이 급변하다 보니 미중 정상 사이에 모종의 밀약(密約)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한반도 체스판에 정작 우리나라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 중국과 김정은이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면서도 다양한 협상 채널을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뒷전에 밀려난 모습이다. 25일 북한 인민군 창건일을 앞두고 미중, 미일 정상들이 연쇄 전화 통화를 했지만 우리나라는 통화 대상에서도 빠졌다고 한다. 미중, 미일 정상들은 고공 플레이를 벌이고 있는데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나라만 구경꾼으로 밀려난 셈이다.

정부는 “한미동맹은 흔들림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이 빠진 권한대행 체제인 데다가 5·9 조기 대선으로 어수선한 시점이라는 변명만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한반도 위기는 우리에게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 미일은 비밀회담을 갖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이 필리핀 지배권을,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서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은밀한 협상이 끝난 뒤 100여 일이 지나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미국은 늑약 체결 후 가장 먼저 외교 공관을 철수시켰다.

그 무렵 고종은 1882년 체결된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다. 고종은 1904년 이승만을 대한제국의 밀사로 미국에 보냈다. 가는 도중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일본에 가려는 태프트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하지만 태프트는 일본에 가서 문제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승만은 태프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무지한 상태에서 외교 협상의 주도권을 놓치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뼈아픈 교훈이었다. 

100년이 지난 역사적 사건과 현재 상황을 같은 잣대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시공간을 뛰어넘는 교훈의 메시지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반도 위기를 다루는 협상 테이블에 정작 우리나라가 빠진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전국 곳곳은 대선후보들의 유세장으로 북적이고 있다. 주도권을 쥐기 위한 날선 공방이 치열하다. TV 토론회에선 새로 스탠딩 자유 토론이 도입됐지만 유치한 말장난만 눈에 띄고 있다. 긴박하게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도 구색 맞추기 이슈일 뿐 뒷전에 밀려나 있는 느낌이다. 이런 식의 토론회를 왜 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질 만 하다. 

5·9 대선 당선자는 당선증을 받자마자 곧바로 국정 운영에 뛰어들어야 한다. 인수위가 구성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의 풍랑은 거세다. 주변 강국이 우리 사정을 봐줄 만큼 너그러울까.
한미동맹은 혈맹이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각국의 이익이다. 트럼프 정부의 파상 공세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중국 시진핑 주석은 무엇을 노리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총성 없는 전장이라는 외교 현장에서 어설픈 낭만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경꾼으로 전락한다면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할 것이다. 

곧 출범할 새 정부가 제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한반도 주변 외교 지형의 틀이 굳어질지 걱정스럽다. 이럴 경우 우리는 다시 100여 년 전 메시지를 떠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대선후보들이 ‘코리아 패싱’의 먹구름을 못보고 있는 것인지, 안 보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칼럼은 대통령선거일 이전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