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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2016년 10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경영학도 출신 약사 겸 번역가 양병찬 동문

새벽 4시 일어나 네이처·사이언스 번역 13년째




경영학도 출신 약사 겸 번역가 양병찬 동문




새벽 4시 일어나 네이처·사이언스 번역 13년째



번역에 집중하느라 강연 거절
상상력과 언어의 정확성 겸비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수준일 뿐이에요. 책을 쓰는 부업 때문에 최신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본업에 소홀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번역가 양병찬(경영80-84) 동문은 스스로를 ‘최신 과학 지식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는 날이 밝기도 전인 새벽 4시에 일어나 ‘네이처’, ‘사이언스’ 등 과학전문 저널의 최신 과학뉴스를 번역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번역을 마치면 포스텍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에 송고하고 오전 8시쯤 아침을 먹는다. 자그마치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해온 일과다. 이렇듯 성실한 그의 일상은 수준 높은 번역을 위한 밑거름이기도 하다.


“과학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이 쌓입니다. 기존의 학설이 깨지거나 재정립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따라서 최신 과학 지식을 수용하는데 소홀하면 한 걸음 뒤처진 번역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손에 쥐는 보수를 떠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거든요.”


불과 2년 전만 해도 그는 잘나가는 약사였다. 지금은 휴업 중이지만 꼼꼼한 복약 지도로 이웃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이사하면서 잠깐 약사 일을 쉬는 사이, 번역 일감이 몰리면서 새로 이사 온 곳에서의 개점을 미뤘고, 현재는 본의 아니게 번역을 전업으로 하고 있다. 이전까진 아침식사 후 약국 문을 열었다면 지금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단행본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하루 12시간 꼬박 앉아서 5쪽씩 나가는 험난한 일이지만, 스스로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


“저는 지금도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우선입니다.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사를 하든 번역을 하든 스스로에게 떳떳한 방법으로 사는 것이 저에겐 중요합니다.”


약사로서 양 동문의 꿈은 환자에게 필요하지 않은 약은 먹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 의료인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약물오남용을 부추기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그럴 수도 있는 편법이지만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고집, 그가 자기 일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이러한 고집을 꿋꿋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에 있어서도 이러한 고집은 변함이 없다. 책을 써보라는 권유는 물론 여러 곳의 강연 요청에도 손사래를 친다. 제대로 번역하려면 모든 힘을 쏟아 부어도 빠듯하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에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적당히 요령 피우면 집필도 강연도 못할 것 없지만, 스스로 정해 놓은 ‘질’을 떨어뜨릴 수 없어 번역에만 매진한다. 전업한 지 2년 만에 ‘센스 앤 넌센스’, ‘나만의 유전자’, ‘매혹하는 식물의 뇌’, ‘곤충연대기’, ‘영화는 우리를 어떻게 속이나’ 등 왕성한 역서를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미친 성실함’에 있다.


번역가로서 그의 꿈은 전 세계 지성사에 일획을 그은 인물들의 평전을 번역하는 것이다. 최근 번역 출간한 ‘자연의 발명’은 그 꿈을 실현하는 첫걸음인 셈이다. 시대를 앞서 나갔던 당대 최고의 지성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생애를 재조명한 이 책은 올해 영국 왕립협회 과학도서상을 받기도 했다.


“총동창신문에서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잠깐 망설였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하거나 남부럽지 않은 부를 일군 동문들이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그런 회의감을 물리친 것이 생태계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입니다. 서울대 출신이면 안정된 엘리트 코스 밟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동문들에게 저처럼 독특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증권가에서 돈 꽤나 벌 때도 있었지만 저는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1980년 모교에 입학해 경영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양 동문은 외환은행, 대우증권, 대한항공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IMF 외환위기 때 좀 더 실용적인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1999년 중앙대학교 약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2014년까지 10여 년간 약사로 일하다 생명과학에 눈을 뜨며 번역을 병행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엄밀함을 두루 갖춘 그의 번역은 의약학 전공자들에게는 물론 대중 독자들에게도 쉽게 잘 읽히는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