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호 2023년 8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 신기…물도 좋고 동물도 좋아 수생동물 수의사 됐어요”
홍원희 (수의학07-11) 아쿠아플라넷 제주 선임 수의사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 신기…물도 좋고 동물도 좋아 수생동물 수의사 됐어요”
홍원희 (수의학07-11)
아쿠아플라넷 제주 선임 수의사
국내 첫 수족관 전속 수의사
뒤따를 사람 위해 11년 버텨
천혜의 관광지 제주. 그중에서도 명소로 손꼽히는 ‘아쿠아플라넷 제주’는 600여 종, 5만여 마리의 수생동물이 전시되는 세계 수준의 초대형 해양종합문화시설이다. 11년 전 개관한 이곳에서 11년째 수생동물을 보살피고 있는 홍원희 선임 수의사는 입사 초기 수중공연에 출연하라는 지시를 받을 만큼 ‘수생동물 수의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상황에서 이후 개장한 아쿠아플라넷 여수, 일산 및 제2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에도 전속 수의사가 배치되는 현재를 개척한 선구자다. 홍원희 동문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예전엔 전속 수의사 없이 외부 수의사들과 계약을 맺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문제가 생긴 동물을 치료하는 정도였습니다. 예방 진료 같은 건 엄두를 낼 수 없으니 수족관 폐사율이 높았죠. 그런데도 제게 기대됐던 건 ‘동물을 치료할 수 있는 아쿠아리스트(수중공연과 함께 수중생물의 사육·관리 담당)’였어요. 수의사란 직군을 정착시키기 위해 수의사만이 할 수 있는 업무를 찾아 자리를 만들어가야 했죠. 갖춰진 장비가 많지 않아 진료를 보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폐사하는 동물이 생기면 눈총이 따가웠습니다.”
모교 졸업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린매멀센터와 캐나다 밴쿠버 수족관에서 학생 익스턴(인턴보다 시간과 비용을 덜 투입하면서, 직무 교육에 집중하는 형태)으로 근무한 적 있는 홍 동문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해외로 나가야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처음 1년 동안은 진료 환경이 잘 갖춰진 곳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그러나 일산 수족관에서 일하는 후배 변재원(수의학08-14) 동문을 만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홍 동문이 먼저 겪은 고충을 똑같이 겪고 있었던 것.
“사표를 낸 그 후배가 퇴사 직전 저를 지목해 인턴으로 교육받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됐어요. 혼자서 주변의 생각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또 얼마나 도망치고 싶은지 잘 알면서 여태 그를 혼자 뒀다는 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수족관 업계에서 수의사의 자리를 잡는, 초석을 다지는 일이란 것도 깨닫게 됐죠. 제가 적응 못 하고 나가면 다시 이 자리를 만드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뻔했어요. 제 생각을 바꾸게 된 건 다 그 후배 덕이죠. 힘을 합쳐 으쌰으쌰 해서 수의사 자리를 더 만들자는 목표도 생겼었습니다.”
아쿠아리스트, 수산질병관리사(수산업에 초점을 맞춰 어류의 치료를 담당) 등 기존 직군 직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을 만큼 바빴다고. 특히 모교 수의대 동문들이 발 벗고 나섰다. 모교 서강문(수의학82-86) 교수는 당일치기로 제주에 내려와 눈 다친 물범의 수술을 집도했고, 제주대 김재훈(수의학82-90) 교수는 병리학적 차원에서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홍 동문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동문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다른 대학 생물학과를 나와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다가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좋아하는 동물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한 번도 못 해보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깨달음에 직장을 그만두고 편입시험을 준비했었죠. 10살 아래 동기들이지만 저는 불편하지 않았어요. 동기들이 저를 어려워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웃음). 다들 너무 똑똑한데 나이 탓인지 공부를 쫓아가는 게 힘들었죠.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니 자괴감도 들었고요. 수의대는 필수과목이 많아 고등학교 때처럼 교수님들이 각 반으로 오셔서 수업하는데, 졸업식 날 동기들을 이렇게 다 같이 볼 일은 이제 없겠구나, 싶어져 서운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원체 정이 많은 홍원희 동문. 치료하던 동물이 잘못되면 억장이 무너진다. 폐사한 동물은 원인을 정확히 밝혀야 하기 때문에 부검을 하는데, 돌보던 동물을 부검할 땐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고.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충고를 곧잘 듣지만,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행인 건 치료를 통해 동물들에게 건강을 되찾아주는 즐거움 또한 질리지 않는다는 것.
동물 복지 차원에서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에 따라 수족관·동물원 법이 점차 바뀌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수족관은 수의사 채용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도 진행될 전망이다. 수생동물 수의사에 대한 인식도, 회사의 생각도 바뀌었다. 진료실·처치실·약제실·임상병리실을 갖춘 메디컬센터가 만들어졌고, 전국 수생동물 임상 수의사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축해 수시로 학술적·실무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고요한 아침, 수족관을 돌며 물속 동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평온함을 누릴 수 있는 제 직업에 감사하단 생각이 절로 듭니다. 동물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 재밌어요. 할리퀸새우가 불가사리를 밥상 삼아 먹이를 얹어놓고 먹는 것도 귀엽고, 다가가면 인사하고 지나가는 큰돌고래도 반갑죠. 나름 위장이랍시고 돌처럼 가만히 있는 친구도 있고, 무심히 제 갈 길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친구도 있어요. 어떤 문어는 소라 껍데기 안에 숨어 눈만 빼꼼 내밀고 있다가 제가 손가락을 뻗으면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촉수를 쫙 뻗기도 해요. 도저히 안 예쁠 수가 없죠!”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