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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2016년 5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 청년 한국과 노년 일본

양영수(영문67-72·종교65-69) 제주대 명예교수·소설가

동숭로에서
청년 한국과 노년 일본

양영수(영문67-72·종교65-69) 제주대 명예교수·소설가
















얼마 전에 중국의 장가계와 계림으로 구경 갔을 때 우리의 관광가이드는 매우 흥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들 두 곳 관광명소에 대한 한일 양국 국민들의 선호도가 크게 대비된다는 얘기였다. 호남성의 장가계에서는 깎아지른 듯이 위태로운 천길 낭떠러지를 올려다보면서 조심조심 걸어가거나 구름 위로 높이 솟은 가파른 산봉우리를 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걸음을 옮기는 곳이 많았다. 반면에, 화남지방의 계림 일대는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산봉우리들이 평화로운 지평선 위에 한가로이 정좌한 곳이어서 수려하고 아담한 산수화 같은 정취가 느껴졌다.

장가계의 풍경이 웅장하고 급박하고 전율적이라면 계림의 그것은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고 안정적임이 대조적이었는데, 한국인들은 장가계 관광을, 일본인들은 계림 관광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나는 이 같은 차이가 양국 국민들의 국민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장가계를 좋아하는 것은 아슬아슬한 모험을 즐기는 역동적인 국민이기 때문이고, 일본인들이 계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격변을 피하고 안전제일을 추구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대뜸 결론부터 내놓고 보니까 여기에 맞아들어가는 사례들이 많이 떠올랐다. 종전 후 한국정치사에서는 수백개의 정당을 만들고 부수는 모험을 했지만, 일본은 손꼽아 셀 정도의 정당들이 등장했는데 반세기 전의 제1당이 지금도 제1당이다. 한국의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여야대치의 극렬 드라마를 보고는 한국 의회정치의 후진성 운운하는 이가 있겠지만, 금방 결딴날 것 같다가도 다시 이어붙이고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양상을 놓고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본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말도 들린다. 한국문학에서는 굴곡 많은 사회소설이 주류인 반면에 일본에서는 개인적인 신변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풀어가는 사소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동남아를 넘어 이제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한류열풍은 한국인 특유의 풍류기질, 감성적인 역동성을 말해준다. 폭죽처럼 터지고 회오리처럼 돌아가는 한국 연예인들의 퍼포먼스를 일본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

월드컵 경기 응원시에 수만 군중이 광화문광장에 운집하여 환호했던 한국인들의 대중적인 열기는, 안방 텔레비전 앞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식 응원과 달랐다. 일본인들에게는 거리응원에 열을 올리면서 소란 피우는 것은 한밤중 시민들의 안면을 방해하는 무교양으로 비쳐진다는 얘기였다.

또한, 대담한 창업모험가를 존중하는 한국 기업계와는 달리, 일본 제조업체들은 위험부담이 큰 신제품 개발보다는 기존 제품의 개량을 통한 경쟁력 강화라는 안전투자를 선호한다고 들었다. 해외건설 사업에서 한국 건설사만큼 난공사에 겁 모르고 뛰어드는 나라가 없고 한국 노동자들만큼 공사기간을 짧게 단축시키는 나라가 없다고도 하였다.

뭣 모르고 쓰다 보니 섣부른 국민성 시론의 얄팍함이 드러나는 것일까. 양국의 역사를 조금만 더 들여다봐도 얘기가 달라질 판이다. 구한말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 선비들은 굼뜨고 무표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근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인들도 한때는 스릴 넘치고 역동적인 역사의 주인공으로 엄청난 벤처사업을 벌인 바가 있다. 그들은 두 번씩이나 바다 건너 조선정복의 꿈을 불태웠고 자기네보다 몇십배나 큰 강대국들에게 겁도 없이 선전포고를 한 역사가 있다. 서양문물 도입에 혈안이 되었던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은 아찔할 정도의 고난도 일대변혁을 시도했다고도 한다.

한일 두 나라는 사회발전의 단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역동적인 삶의 패턴은 그것이 지니는 불안정성이라는 면에서 청년기에 해당될 터이다. 반면에, 일본사회에 굴곡과 기복이 덜한 것은 열정적이지만 불안정한 청장년기를 모두 거친 다음에 단조롭지만 편안한 삶을 바라는 노년기에 달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