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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2016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새만금이 대한민국 새 성장동력 될거라 100% 확신한다”

오종남 새만금위원회 민간위원장


“새만금이 대한민국 새 성장동력 될거라 100% 확신한다”


유니세프 이어 새만금 위원장도 무급 봉사
노후 설계·행복 강연가로 바쁜 나날 보내




오종남(법대71-75) 동문은 젊은 시절보다 60대인 지금이 더 바쁘다. 새만금 민간위원장을 비롯해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 서울대 과학기술혁신최고전략과정 명예주임교수, 광주고총동문회 회장, SC제일은행 감사위원장, 행복 경영 강연가 등으로 그를 찾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시절 무급 봉사로 잔잔한 감동을 줬던 오 동문은 새만금 민간위원장도 보수없이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이 궁금했다. 오 동문은 사전 질의서도 요청하지 않고 인터뷰 시간도 두 시간을 할애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광화문 인근 사무실로 찾아가 일과 삶에 대해 묻고 들었다.



-일이 많아 건강관리를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일하면서 기를 받습니다. 되도록 많이 걷도록 노력하고 섭생에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빵, 밥 같은 탄수화물은 가급적 피합니다.”


-경제 관료 출신이신데 노후 설계, 행복 강연가로 유명하시죠. 계기가 있으세요.
“2002년 2월부터 2004년 9월까지 2년 반동안 통계청장으로 있으면서 생명표와 신생아 출산 통계를 분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식이 별로 없었던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죠. 2004년 9월부터 2006년 10월까지는 워싱턴DC에 소재한 IMF에서 상임이사로 근무하면서 우리 한국인의 삶을 조명해보는 기회를 가졌어요. 한국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기쁜소리방송’에서 매주 ‘오종남의 행복이야기’를 진행하고 기러기 가족의 자녀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행복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특강에서 주로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면.
“‘가족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적자생존(赤字生存 손해 보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입니다. 손해 보는 사람 주변에는 늘 사람이 넘쳐요. 또 만나고 싶어해요.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는 가장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요 참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 동문은 지난해 11월 국무총리급인 새만금위원회 제4대 민간위원장에 선임됐다. 위원회가 발족된 후 지난 6년간 정치인이 위원장을 맡아오다 경제관료 출신으로는 그가 처음으로 수장에 올랐다. 오 동문은 “갑자기 통보받았다”면서 “이제는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일을 하라고 부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새만금 사업은 1991년 노태우 대통령 3년차 시절 첫 삽을 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金堤)·만경평야의 앞 글자를 따 새만금(萬金)이라 이름 지었다. 서울 3분의 2 크기인 1억2,300만 평(409㎢)을 일구는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그러나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국책사업이기도 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에서 출발합니다. 당시 수교되지 않았던 소련과 중국과 길을 터서 동토 평양을 녹이자는 정책이었지요. 중국과 근접한 적지를 찾다보니 이곳이 후보로 올라 간척사업이 시작된 겁니다.”


-과정이 지난합니다.
“워낙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대법원까지 가기도 했고요. 결국 2010년 방조제 사업은 끝을 봤죠. 물막이 공사가 끝난 거예요. 방조제 길이가 33.9km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32.5km)가 가장 길었죠. 지금은 물이 빠져나가도록 하면서 동시에 매립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일부는 매립이 돼 몇몇 기업에 분양이 됐다고 들었는데.
“군장산업단지 옆에 대략 100만 평이 매립돼 산업연구단지가 조성됐습니다. 그 중 약 30만 평이 분양돼 현재 일본의 도레이, 벨기에의 솔베이, 우리나라의 OCI 발전소가 들어와 있습니다.”


-1억2,300만 평 중에 100만 평이면 한참 시간이 걸리겠네요.
“큰 그림을 먼저 말씀드리면, 1억2천3백만평 중에 30%는 수면으로 놔두고, 20%는 농·생명단지 나머지 50%에 산업연구단지, 위락시설, 복합리조트 등을 만들 계획입니다. 이런 계획들이 빛을 보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저도 ‘언제 마무리 된다’는 말씀은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새만금 사업과 관련된 기관이 시·도 지자체를 비롯해 개발청 등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간척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가 시행하고 있습니다. 국무총리실 새만금사업추진지원단이 최근 만들어졌습니다만, 실질적인 업무는 새만금개발청이 담당합니다. 새만금위원회는 전체 그림을 그리고 각 기관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청장 차원에서 힘든 투자유치도 이끌어 내고요. 국무총리와 제가 공동위원장이고 국무위원들과 민간전문가가 반씩 총 30명 이내로 구성됐습니다.


지난 2월 9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세 가지 주문을 하셨어요. 하나는 새만금사업 관련해 기본적으로 원스톱 서비스를 해라. 부안군, 김제시, 군산시, 전북도, 새만금개발청, 농어촌공사가 다 관계돼 있는데 민원이 오면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거였죠. 또 규제가 안 풀리면 새만금위원회에서 결정하라는 지침도 주셨고요. 세 번째는 중국 리커창 총리와 협의한 한·중경협단지를 조속한 시일 내에 조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기업이 여기 와서 물건을 만들면 한국 내 수요도 있겠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선호하는 중국 사람들도 타깃이 될 수 있습니다. 투자 매력도 계속 어필해야죠. 또 외국기업에 주는 혜택만큼 국내기업에게도 주도록 했습니다.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국내 산업 단지에서 이런 예는 없었죠.”


-위원장으로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세요.
“현재 100만 평 정도가 산업단지로 조성됐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부지에 우선 투자를 이끌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두 번째 임무로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만들어야죠. 지금도 마스터플랜이 있긴 한데, 제 눈에는 ‘청사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외국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설명하기 애매한 수준이죠. 지금 나온 계획에는 이 드넓은 땅에 거주인구 28만명, 유동인구 70만명을 말합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되고 적어도 실시계획 이전에 기본계획 정도 되는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려고 합니다. 100만명은 넘는 도시로 구상해야 삶의 터전이 되지 않겠어요.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들이 만족할 만한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야죠. 시민들이 아이를 낳아 교육도 시키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문화, 생활편의 시설들을 갖춰야죠. 그래서 ‘문화가 숨 쉬는 새만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어요. 매월 민간 전문가들과 모여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곳곳에 산업단지들이 만들어지고 있어서 낙관적으로만 보기 힘들지 않나요.
“새만금은 송도 등 다른 지역과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돼요. 이곳은 국내, 아니 중국, 일본을 포함해서 유일하게 미래 중요 산업으로 꼽히는 항공정비(MRO) 사업 같은 것을 유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에만 비행장이 400개가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항공기 정비수요가 얼마나 많이 늘어나겠어요. 항공정비 사업에 평평한 땅이 수백만 평 필요합니다. 국내를 포함 주변 3국 중에 이곳 만한 공간이 없어요. 지금 삼성동 무역센터는 주차장 수입이 가장 크고, 인천공항도 주기장 수입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충분하지 않은 여객 운송 수요 때문에 어려운 국제공항 건설에서 방향을 바꾸어 항공정비 사업을 유치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새만금이 대한민국 성장의 젖줄이 돼 줄거라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40년 경험에 비춰 볼 때 중국을 포함한 드넓은 시장에 새만금 만한 지정학적 위치가 없습니다. 천천히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가려고 합니다.”


오 위원장은 새만금 계획과 관련해 인구고밀도 지역인 상해, 북경, 동경, 오사카 등의 중심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앞으로 우리의 내수시장을 대한민국에 한정한 5,000만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변국 대도시까지 아울러서 3억 인구로 봐야 합니다. 이를 저는 ‘내수 프라임’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에 새만금이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5,000만명을 대상으로 살면 안됩니다. 비행기로 3시간 거리까지는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 동문은 모교 졸업 후 1975년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해 경제기획원과 재정경제원에서 주로 일했다. 청와대에서는 정책·건설교통·산업통신·재정경제 네 분야에서 대통령 비서관을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농업비서관을 빼고 다 하신 거네요.
“저에게 무슨 ‘빽’으로 살아왔냐고 물으면 ‘일빽’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모신 분들이 잘되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강봉균(경영64-69·새누리당 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 이기호(경제64-68) 경제수석 두 분 아래서 네 분야의 대통령 비서관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강 장관님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전북 고창의 석곡초등학교 6학년 때 강 수석님께서 4학년 선생님이셨어요. 군산사범을 나와 교사를 하신 거지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서울대 입시를 준비하셨어요. 제가 법대 진학한 후 임원택 교수님의 권유로 공무원이 된 후 경제기획원에 들어갔는데, 어느날 강봉균 과장(당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기억 안 나느냐고. 그 이후 특별한 관계가 됐습니다. 이 어른이 1998년 2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가시면서 저를 부르셨어요. 그렇게 대통령 비서관으로 인연을 맺어 재정경제비서관까지 하게 된 것이죠.”


-국정에 대한 안목이 상당하실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안은 없었습니까.
“통계청장, IMF 이사까지 지내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죠. 그렇지만 정치보다는 다른 일로 봉사하는 게 저한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공직을 마치고 10년째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하는 일은 외국 다국적기업 CEO를 상대로 한국의 장점을 홍보하고 그분들의 애로사항을 풀어드리는 거예요. 이 일은 제 적성에 가장 잘 맞는 일인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고요. 자기가 좋아하면서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 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오 동문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시절 무보수로 일하면서도 정기후원자 수 38만명(세계 총 600여 만명)으로 세계 1등을 기록했다. 모금액으로는 3등이었다. 오동문은 새만금 민간위원장을 맡으면서도 무보수를 자처했다.


“새만금위원장 선임 통보 후 청장이 와서 국무총리급입니다만 예우가 좀 빈약하다고 해요. 제가 그랬어요. 첫째 수당받지 않겠다. 둘째 업무용 카드 쓰지 않겠다. 셋째 업무추진비 안 받고 무료봉사 하겠다고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서 일하실 때와 마찬가지시네요.
“폐교된 시골 학교 촌놈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나라 세금으로 공부해서 쌓은 지식이니 내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받을 만큼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제는 봉사를 해야죠.”


-가족 중에 동문이 있으세요.
“없어요. 제가 태어난 1년 후 아버지께서 군인으로 전사하셔서 외아들로 컸어요. 그 때문에 저는 아이들 셋을 두었어요. 2녀 1남. 큰 딸(78년생)은 은행원인데 육아휴직하고 현재 남편따라 홍콩에 가서 두 아들 키우고 있습니다. 둘째 딸(80년생)은 스탠퍼드에서 MBA 받고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회사인 Stratio에서 CSO(Chief Strategy Officer)로 일하고 있어요. 막내인 아들(82년생)은 필라델피아 Wharton MBA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것 같아요. 어떠세요.
“전혀요. 부모님한테 받은 모습 이대로 사는 게 좋아요. 나이가 들면 나이 든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야죠.”


<김남주 기자>





PROFILE


한국인 첫 IMF 상임이사 지내


전북 고창 석곡초, 고창중, 광주고를 거쳐 모교 법대를 졸업하던 1975년 행정고시(17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오 동문은 1980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텍사스 주 서던메소디스트대(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대학원에서 MBA와 경제학박사를 취득했다.


정읍군에서 수습사무관을 거친 이후 경제기획원과 재정경제원에서 주로 일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돼 정책3비서관, 건설교통비서관, 산업통신과학비서관, 재정경제비서관 등 국내에서 유일하게 비서관을 네 자리나 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2월부터 2004년 9월까지 통계청장을 지낸 뒤 한국인 최초의 IMF 상임이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10년째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를 상대로 경영 자문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캉드쉬 IMF 총재, 울펜손 세계은행 총재 등의 통역을 도맡아 한 그는 한일 재무장관회담 통역을 맡을 정도로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다.


영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행복 전도사로 ‘배려’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인 당신의 미래’, ‘은퇴 후 30년을 준비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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