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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015년 8월] 뉴스 본회소식

국권회복 최전선에 선 서울대인

<광복 70주년 특별기고> 서정화 회장

민족자존 위해 노력했던 서울대인 정신 다시 새기자


법관양성소 졸업생 독립운동에 앞장

관립학교 생도들 3.1운동 만세시위 주동해


대한제국의 위기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한반도에 개입한 열강 간의 세력균형을 유도하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고종의 중립외교는 러시아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 러일전쟁 와중에 한국을 무단으로 점령한 일본은 1904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을 강요하여 대한제국-러시아간 외교관계를 단절시키는 한편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외교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이후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대한시설세목(對韓施設細目)등으로 구체화된 뒤, 1905년 내정권과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국권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러일전쟁 직후 보름 만에 한일의정서를 강요당한 고종은 일본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연이어 친서를 보내 일본군의 한반도 점유가 불법임을 강조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은 국제법상 보전 받아야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외교활동의 연장선에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이 존재한다.


헤이그 특사의 당당한 외교


1899년 러시아의 제안에 의해 처음 개최된 만국평화회의는, 서구 강대국 사이에 증가하던 군비경쟁을 조정하고 군사적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결성된 협의체였다. 1907년 개최된 제2차 회의 당시 한국에도 의석이 배정되어있었으나 외교권 대리자를 자처한 일본의 방해로 공식 사절을 파견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이상설, 이 준, 이위종을 특별사절로 임명하고 미국 선교사 헐버트를 안내역으로 배정하여 특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방해로 인해 본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흔히 알려진 밀사(密使)’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들은 숙소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대표임을 분명히 했다. 본회의장 입장이 거부되자 회의장 앞에서 일본정부의 한국 외교권 강점이 부당하며 한국은 당시 국제법에 비추어 명백히 독립국이라는 점을 논증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각국 기자단이 결성한 국제협회에 귀빈으로 초청받아 적극적인 언론전을 펼치는 등, 매우 세련된 외교 감각을 보였다. 그로부터 대략 10년 남짓 전인 1894년 청일전쟁과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정부를 강제 점거당하고 왕후가 시해당하는 폭거를 겪었음에도 아무런 외교전략도 세우지 못했던 상황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것이다.


국제적 감각과 외국어 실력 갖춰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헤이그 특사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사단의 정사(正使)인 이상설은 특사 파견 당시 37세로, 1894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을 역임한 전형적인 유학 관료였으나 독학으로 외국어와 국제법을 학습하는 등 개명한 면모를 보였던 인물이다. 한편 이위종은 고종의 심복이었던 이범진의 아들로서, 20세 때부터 부친을 따라 미국, 러시아에서 오래 체류하면서 국제적인 감각과 외국어 실력을 갖췄다. 헤이그 당시에는 30세로, 헐버트와 함께 특사단의 통역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적자원들이야말로 1897년 황제국 선포 이후 대한제국이 추구했던 독립외교정책의 결실이며, 헤이그에서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라고 하겠다.

특히 이 준은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이자 평리원(오늘날의 대법원) 검사를 역임했던 법관이었으며, 파견 당시 49세였던 중견 관료였다. 법관양성소는 189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현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시초로서, 서울대학교는 1895년을 본교 개학(開學)’의 기원으로 확정한 바 있다.


특사단의 실질적 리더 이 준


법관양성소는 법학통론(法學通論)’ 등 개론적인 과목 외에 민법, 상법, 형법, 소송법, 국제법 등 실무적인 법학과목을 교수하여 실무 법조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준 또한 국제법을 포함한 서구의 근대 법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중견 법조인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특사단의 실질적인 리더는 바로 이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과 열강이 특사단의 호소를 외면하자 끝내 이 준은 곡기(穀氣)를 끊기 시작했으며, 의식을 잃은 듯 몇 시간을 누워있다가도 방문한 서구의 기자들에게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1907720일자 헤이그 현지에서 발간된 만국평화회의보’) 이 호소는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국권수호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한 최초의 서울대인으로서 이 준 열사를 학교 차원에서 추앙해오고 있다.


법관양성소는 이 준 외에도 함태영(한성재판소 판사), 홍진(충주재판소 검사, 평리원 판사) 등 대한제국기 주요 법조인들이 양성하는 산실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법관양성소 졸업생은 한국 사법체계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산하 서울대학교 120년사 편찬위원회가 수행 중인 연구결과에 따르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사법관리를 포함한 수천 명의 일본인 관료들을 강제로 한국 정부에 임용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사법제도 또한 일본인 관료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법관양성소는 결국 본래의 위상을 잃고 1909년 폐지에 이른다. 그러나 함태영, 홍진 등이 병합 이후 각각 3.1운동 민족대표, 상해임시정부 의원으로 활약하는 등 법관양성소 졸업생들 중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민족적 모범으로서 족적을 남긴 바 있다.


전문학교 민족적 자의식 가져


한편 법관양성소는 1909년 법학교(法學校)에 이어 1911년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지금의 전문대학급)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구한말 관립학교로서 설치했다가 일제강점기 전문학교로 잔존한 교육기관들은 경성전수학교 외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고보 사범과(京城高普 師範科)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전문학교이면서 대한제국기 관립학교의 후신이라는 민족적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120년사 편찬위원회19193.1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를 포함한 구한국기 관립학교의 생도들이 만세시위를 주동하여 대거 구금되었다는 기사가 토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등 일본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는 법관양성소를 시초로 한 대한제국기 관립학교들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일제강점기 전문학교들에게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이들 전문학교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광복 이후 1946년 서울대학교 설치령을 통해서 오늘날의 서울대학교로 통합되었음을 감안할 때, 구한말의 이 준 열사, 일제강점기 전문학교 학생들이 보여줬던 의기야말로 오늘날 서울대인의 존숭해야할 모범일 것이다.


광복 이후 70년이 지났으나 조국은 여전히 분단의 아픔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산업화 이후 최대의 불황마저 겪고 있다. 국제사회의 불안정성도 날로 증가하여 조국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총동창회는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의 역사를 확립하기 위해 지난 2년간 편찬사업을 추진해왔다. 이를 통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민족의 자존을 위해 노력했던 서울대인의 정신을 다시 새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