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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2023년 5월] 뉴스 본회소식

베일 벗은 교동도의 시간을 엿보다 

국토문화기행

4월 20일 본회 국토문화기행에서 30여 명의 동문이 강화 교동도를 다녀왔다. 예로부터 개성과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으로서 교동도의 군사적 중요성은 컸다. 최근 복원된 교동읍성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베일 벗은 교동도의 시간을 엿보다 
 
국토문화기행 
 
북한과 2.6km 거리 경계 삼엄
어업보다 농사 주업, 쌀 특산물
연산군 등 왕·왕족 유배 흔적도


서해의 ‘인후지지(咽喉之地)’ 강화도의 부속 섬 중에서도 교동도는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목구멍 같다 해서 ‘양경인후(兩京咽喉)’로 불렸다. 그래선지 삼켜낸 것도 많았다. 유배자의 쓸쓸함, 2.6km 거리 북녘서 넘어온 실향민의 그리움, 바다로 막힌 시간의 흐름까지. 그런 교동도가 꾹 삼킨 매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2014년 강화도와 이어지는 교동대교가 놓이면서다. 지정학적 긴장감과 벼가 쑥쑥 자라는 옥토의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섬. 가는비 내리던 4월 20일, 본회 국토문화기행에 나선 30여 동문이 안갯속 교동도를 헤집고 다녔다.   

교동도는 차를 타고 닿을 수 있는 서북쪽 끝 땅이다. 서울에서 달린 지 1시간 반 만에 교동대교 앞 해병대 검문소 앞에 멈춰섰다. 간단하지만 엄격한 절차가 황해도 코앞의 민통선 지역임을 실감케 한다. ‘이곳은 바다가 철책이고 휴전선’이라는 이민부 교수의 말에 다리를 건너며 본 바다는 헝클어진 펄 외에 두터운 해무가 모든 것을 가렸다. ‘많은 걸 보여주진 않겠구나’ 긴장이 됐다. 

처음 하차한 곳은 ‘고구1리’ 표지가 세워진 고구저수지 입구. 관광객은 안쪽으로 내달리기 바쁘고, 낚시꾼은 물만 바라보는 이곳에 굳이 멈춘 이유는 고구리 읍성터를 보기 위해서다. 저수지 맞은편 ‘교동동로 293번길’ 초입 흙과 마른 넝쿨이 뒤덮여 흔한 동네 구릉처럼 보이는 곳 앞에 이민부 교수가 섰다. ‘여기가 성벽이었다’는 말에 모두 고개를 갸웃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교동도 중심지는 고읍리(현 고구리)였습니다. 화개산 북쪽에 고구려 방향으로 성을 지었는데 산 남쪽으로 성을 옮기면서 엉망이 됐죠. 조금만 걷어내면 남은 성이 보이고 보존도 할 텐데, 안타까워요.” 조선 중기 옮겨 지은 교동읍성은 남아 있던 문루나마 살려 복원했으니 사정이 낫다. 옛 성터의 무상함에 여기저기 탄식이 흐른다. 그러다 누군가 간신히 드러난 성돌 몇 개를 가리키자 보물 찾은 듯 기뻐했다. 
 

교동도 고구리 옛 읍성터를 찾은 동문들.


화개정원에 교동도에 유배됐던 연산군의 위리안치소가 남아 있다.


실향민들이 고향 시장을 본떠 만든 대룡시장은 옛 정취가 넘친다.


소박한 지음새의 교동교회 옛 예배당.


잊혀진 것은 성만이 아니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교동도는 연산군, 광해군, 안평대군 등 왕과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수도와 가까워 감시하기 쉽고 나오기는 어려우니 제격이었을 터다. 연산군은 1506년 9월 가을바람 부는 교동도에 들어와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문을 연 화개정원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니 연산군의 위리안치소를 재현해 놓았다. 주변은 화려한 꽃대궐이라 가시돋힌 탱자나무 둘러친 한 칸 방이 더 쓸쓸하다. 한 동문이 ‘인수대비가 저희 집안 분이라 연산군과 먼 친척인 셈’이라며 유심히 둘러본다. 

다시 광대한 논 사이를 달리며 오로지 농사만 짓는 섬이란 게 실감 났다. 산업시설도 정미소와 농기구상 정도다. 어업은 드물고 축산 농가도 없다. 고려 초 왜구와 중국을 방어하려 주둔한 군사들에게 농사 짓게 한 것을 시작으로, 끈질긴 개간과 간척 끝에 세 개의 섬 사이를 메워 평야를 만들었다. 이민부 교수는 “습지대를 농경지로 바꿔 가면서 쌀 농사 생산성이 계속 높아졌다. 교동도에서 1년 농사지은 쌀로 강화군민은 4년, 교동도 사람은 58년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쌀맛도 좋다”고 알려줬다. 
 
고립된 섬이기에 논 가운데 작은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저장하는 ‘물광’, 윗논에 물을 채워 모내기철 아랫논에 보내는 ‘동답’ 등 여러 꾀를 냈다. 농경지 아래 펄 성분이 많아 물 가두기에 좋은 땅이다. 그것도 모자라 교동평야에 마르지 않는 젖줄을 대려 만든 것이 난정저수지다. 둑 위에 오르자 ‘저수지인가, 바다인가’ 싶다. 둘레만 5km인데다 안개로 바다와 구분이 안 되는 탓이다. 인근 논 옆 관개수로에도 새파란 물이 넉넉히 흘러 보는 마음이 다 든든하다. 

섬 곳곳에 있는 주민 대피소 앞을 기웃대자 트럭을 탄 마을 주민이 언뜻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간다. 지리적 여건 탓에 여러 혼란을 겪은 섬이다. 6·25 이후 북한 연백평야에서 건너온 실향민만 3만명, 섬의 중심지 자체가 그들을 따라 대룡리로 이동했다. 실향민들이 고향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대룡시장은 꼭 들러야 할 명소로 꼽힌다. 옛날 다방과 이발소 등 1970년대 모습을 간직한 분위기에 좁다란 골목 양쪽에서 호떡과 꽈배기 냄새가 진동해 지갑이 스르르 열린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7분 거리, 남산포는 해안 경계가 삼엄한 교동도에서 유일하게 어선이 드나드는 포구다. 새우가 맛있기로 유명한데, 영험하기로도 이름났는지 날이 좋을 땐 해안가에 카스테라며 맥주를 가져다 놓고 기도하는 여인들이 보인다고 했다. 포구 앞 비탈 위에 고려 때 뱃길로 오가는 송나라 사신들의 안전을 빌던 사신당이 남아 있다.

마침 사신당 앞에서 기도하다 자리를 거두는 무속인이 있어 호기심 많은 동문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다. 이민부 교수는 “교동도에는 신당이 유독 많고 불쌍한 연산군의 넋을 기리는 이들도 있다. 삶이 힘든 지역일수록 개인적인 신앙에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신당에서 가장 큰 의지가 된 것은 가파른 비탈길에 ‘이거라도 잡으라’며 한 동문이 내민 장우산 대였다. 그 배려 덕에 한 명도 엉덩방아를 찧지 않았다. 정년 후 교동도에 자리 잡았다는 백종만(사회사업73-77 전북대 명예교수) 동문이 연락을 받고 잠시 들러 인사하기도 했다.  



교동도에서 현재 유일하게 배를 댈 수 있는 포구인 남산포. 사신당이 주변에 있다.


섬 안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동읍성과 1127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 교동향교에 들를 수 있다. 향교는 그 시절 지방국립대인 셈이니 섬의 교육열을 짐작게 한다. 교동도 출신 위인 중 한 명이 한글 점자를 창시한 박두성 선생이다. 서울사대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해 시각장애인의 고충을 알게 된 후 한글 점자 개발에 6년을 매달렸다. 1926년 반포한 6점식 한글 점자 ‘훈맹정음’이 오늘날까지 쓰인다. 교동면 상용리에 생가를 복원해 뒀다. 박두성 선생의 연보와 점자 체험시설이 있다.  

생가 맞은편 박두성 선생이 출석했던 교동교회 옛 예배당이 있다. 검박한 건물과 종루가 완벽한 옛 교회 모습 그대로다. 창문으로 예배당 안을 들여다 보니 감리교식 구부러진 십자가가 보인다. 종루의 끈을 잡아당기자 불순물 없는 청아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종 치는 포즈로 사진 촬영을 부탁했던 한 동문이 “너무 많이 치면 종소리 듣고 교회 올라” 씩 웃으며 카메라를 받아갔다. 

궂은 날씨 탓에 화개산 전망대를 건너뛰었다. 비를 맞으며 섬을 나오는 길에 못 보았던 풍경들이 눈에 밟혔다. 다음에 오면 또 다를 거라고, 속삭이는 섬이 등뒤로 멀어져갔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