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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2023년 4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상연시간 60년, 4막짜리 극

박정기 극작가·연출가·평론가
상연시간 60년, 4막짜리 극   




박정기
회화64-68
극작가·연출가·평론가

 
60년 전의 이야기를 쓰게 되다니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미대에 입학하자마자 고교시절에 연극한 것을 알았는지, 문리대에서 유진 오닐 작 ‘지평선 너머’에 출연해 달라고 해서 디크 선장으로 출연했더니 진짜 배우 같은 연기를 한다고 놀랐다. 총연극회에서 입센의 ‘유령’에도 출연하라고 권해서 만데르스 목사 역을 했다. 목사의 대사가 400개 가까이 되는데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했더니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곧이어 미대에도 연극부가 창단되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장 아누이 작 알베르 까뮈 각색 ‘안티고네’에 크레옹으로 출연했다. 미대 교수들이 공연을 보고, ‘미술보다 연극이 천분인 것 같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그러자 극단 실험극장에서 출연 요청을 해왔다. 김의경 작·최진하 연출의 ‘갈대의 노래’에 출연하고, 동인극장 도스토옙스키 작·까뮈 각색의 ‘악령’에 레비아드킨 대위로도 출연했다. 그 공연을 본 미학과 출신 황운진 연출과 농대 출신 허 규 연출이 TBC TV에서 탤런트를 뽑으니 응시하라고 해, 선발시험에서 방송사가 지정한 연극 대사로 연기를 펼쳤는데 심사위원들이 감성이 풍부하다며 수석으로 합격을 시켰다. 탤런트 실장을 맡으며 TV 드라마 신명순 작 ‘흑야’에서 주인공인 주문모 신부 역을 맡았고, 김기팔 작 ‘춘하추동’에서도 주인공을 맡았다. 한운사 작 ‘금고 할아버지’에 출연해 한국 최초의 TV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모교로 돌아와 단과대학 연극 연출을 했다. 미대, 상대, 공대, 치대, 68극회, 사대, 총연극회 공연을 연출해 달라고 부탁을 해, 연출한 작품들이 ‘안티고네’ ‘성자의 샘물’ ‘갈릴레오 갈릴레이’ ‘인형의 집’ ‘신의 대리인’ ‘파리떼’ ‘안네의 일기’ ‘혈거부족’ ‘암야의집’ ‘계곡의 그늘’ ‘문밖에서’ ‘악령’ 그 외 작품…. 연기지도는 물론, 무대 디자인도 직접 하고, 음악도 직접 선곡하고, 조명도 직접 달았다. 연출료를 주어도 받지를 않고 무보수 연출을 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60년대가 지나가고 1969년 5·16 문화재단이 서대문 정동사옥에 건설되면서 MBC TV가 TBC와 KBS 탤런트 중 인기 있는 몇 사람에게 전속계약금을 주고, MBC TV에서 출연하도록 청했다. 그래서 동료 4명과 함께 MBC로 갔다. 개국 드라마로 박계주 원작 소설 ‘순애보’를 김기팔 작가가 ‘사랑과 슬픔의 강’이라고 제목을 바꿔 각색했다. 그 작품에서도 주인공 이철진 박사 역을 하면서 창창한 앞날을 예측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당시는 유신시절, 도처에서 군사정부 반대시위가 일어나고, 동문 중에서 가까웠던 친구들이 시위를 주도해 체포되고 법정 최고형까지 받아 수감되는 것을 보았다. 혼자만 득세해 승승장구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송과 출연, 연출을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이 바뀌고 다행히 여러 해 수감되었던 친구들이 석방됐다. 나도 하산을 해 귀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공연 관계 인사들이 ‘현재 배우나 연출가는 많이 늘어났는데, 극작가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했다. 당시 삼성문예상의 전신인 도의문화저작상 희곡부문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8년 가까이 제주도에 유배를 당해 있는 동안 추사체를 탄생시킨 것을 ‘고통이 없이 어찌 아름다움이 피어나리’라는 제목으로 응모해 등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추사고택이 있는 충남 예산의 극단 예촌에서 ‘추사 김정희’라고 제목을 바꿔 그 작품을 공연하고, 인천시립극단에서 내 작품 뮤지컬 ‘황금잎사귀’도 공연을 했다.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의 ‘65세의 청년 강우규’, 안양시의 ‘만안교 답교놀이’, 한국의생활문화원의 ‘조선왕조 친잠례 재현축제’, 그리고 탤런트 극회의 ‘아버지를 사가세요’, 극단 신협의 ‘사진속의 젊은이’, 그리고 로얄씨어터의 ‘완전한 사랑’ 등의 희곡을 계속 써서 공연했는데, 소설가 안수길 선생의 장남이자, 대학 선배인 연극·영화 평론가 안병섭 선배가 평론을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현재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평론가가 없다’며…. 

그렇게 쓰기 시작한 미술, 음악, 무용, 그리고 연극과 관련한 공연평이 이십년 가까이 3000개에 이르렀다. 2016년에는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에서 내게 예총예술대상을 주어 수상하기도 했다. 내 열정과 노력을 하늘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는가 싶어, 받으면서 그 은혜에 감사했다. 현재 내 나이가 80을 넘어섰으니 얼마나 더 작품과 평론, 그리고 연출과 출연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박 동문은 극작가, 연출가이자 평론가로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민국 연극대상 심사위원장을 지냈으며, 서울연극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박정기의 공연산책’ 1~4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