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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호 2022년 9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내 인생의 스티커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전 한국광고학회장 에세이
추억의 창

내 인생의 스티커 메시지  



김병희
국문82-86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전 한국광고학회장  


진리는 우리 아닌 '나의' 빛
그 깨달음 인생의 지침 됐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은 암울한 시기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투쟁이 계속돼 캠퍼스에는 늘 최루탄 연기로 가득했다. 운동권이었든 아니었든 모두가 힘든 시절을 보냈다. 어떤 친구들은 ‘시대와의 불화’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몇 권의 책을 읽은 다른 친구들은 녹두거리의 술집에서 내재적 모순덩어리로 가득한 한반도 남쪽의 기득권 세력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운동권이 아니었던 나는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지도 못하고 가두 투쟁에 적극 나서지도 못해 종종 부끄러움을 느꼈다.  

웃풍이 심한 계절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적극적으로 나설 처지가 못 됐다. 내 세상에 있던 여자친구는 느닷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작별을 고해왔고, 내 세상을 만들어준 아버지는 싸늘한 시신으로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둘 다 작별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운동권이 사랑한 대상이 조국과 민족 같은 거대한 것이었다면, 내 사랑은 아버지나 여자친구 같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개인적인 사랑을 추억하며 짙은 허무감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니 거대한 것은 다음 문제였다. 거대한 것과 개인적인 것에 대한 사랑은 같은 무게를 지닌다는 사랑의 등가성(等價性)을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고민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나치던 서울대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하는 “Veritas Lux Mea.” 왜 진리를 우리의 빛이라 하지 않고, 나의 빛이라고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남의 학설에서 비켜서 스스로 찾는 진리가 참 진리라는 뜻을 담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모두가 열광하는 거대한 것보다 개인적인 고뇌가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내 처지에 맞춰 진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합리화했다.



일러스트=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진리는 우리의 빛이 아닌 나의 빛이라는 깨달음은 어쨌든 내 인생에서 중요한 지침이 됐다. 대학교수로서 논문을 쓸 때도 남의 학설을 인용하는 데 치중하기보다, 내가 발견한 ‘나의 빛’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최근에는 ‘스티커 메시지’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한 번에 착착 달라붙게 하는 메시지 원칙에 대해 설명했다. 단순성(S), 표적화(T), 흥미성(I), 구체성(C), 핵심어(K), 정교화(E), 상관성(R) 같은 7가지의 스티커 원칙은 어디에도 없는 ‘나의 빛’이었다.

세월이 흘러 운동권 출신들이 거대한 것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개인적인 사랑에 집착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도했다. 전향이나 훼절(毁節) 같은 심각한 표현까지 굳이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거대한 것을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빛’을 느닷없이 내팽개칠 때는 사랑을 편하게 취사선택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랑이 어떻게 그리 쉽게 변하지? 나는 뒤늦게 다시 알았다. 우리의 빛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있더라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허상이며, 진리는 오직 나의 빛일 뿐이라고. “진리는 나의 빛”이란 말은 라틴어 “Veritas lux mea est(진리는 나의 빛이어라)!”에서 동사 ‘에스트(est)’를 제거한 표현이란 사실이 떠오른다. 우리의 빛이나 남의 빛이 아닌, “진리는 나의 빛이어라!” 앞으로도 이 말은 내 인생의 스티커 메시지가 될 것 같다.



*김 동문은 현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 정부광고자문위원회 초대 위원장, 서울브랜드위원회 제4대 위원장으로 봉사했다. 그동안 ‘스티커 메시지: 스킵되지 않고 착착 달라붙는 말과 글을 만드는 법‘을 비롯한 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한국갤럽학술상 대상(2011)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