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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호 2022년 6월] 뉴스 본회소식

총리 잘리고 선거 지더라도 국익을 우선하는 독일의 리더십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조찬포럼 

총리 잘리고 선거 지더라도 국익을 우선하는 독일의 리더십

김황식(법학67-71)
호암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여론 목매지 않고 소신 지켜
존경 받는 전임 총리 수두룩



2003년 독일 공영 TV ZDF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설문 조사했다. 1위가 콘라트 아데나워, 3위가 빌리 브란트, 13위가 헬무트 콜, 21위 헬무트 슈미트, 27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82위 게르하르트 슈뢰더…. 조사 시점 당시 종전 후 독일 총리는 모두 7명, 그중 6명이 100인 안에 이름을 올렸다. 아직까지 전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떠난 대통령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정치 지도자가 이토록 뜨거운 국민적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어떻게 독일 총리는 모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이 국무총리 퇴임 후 독일로 간 이유다. 5월 12일 김황식 동문이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을 주제로 본회 조찬포럼 연단에 섰다. 김 동문은 강연료 대신 동명의 책을 구입, 참석 동문 전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수십 개의 군소국으로 분할돼 있던 독일은 1871년 통일국가를 이뤘고, 먼저 산업화에 나선 영국 등 이웃 나라를 뒤따르며 국력을 키워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죠. 전쟁에 패하면서 국토는 분단되고 국민은 도탄에 빠져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만, 오늘날 독일은 통일을 이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전범 국가란 오명을 떨쳐내고 유럽연합의 중심국가로서 역할을 하고 있죠. 독일의 눈부신 변화·발전엔 독일 총리의 리더십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독일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73세 때 취임해 14년간 재임했다. 군대도 외교권도 없는 시절의 총리로 2차 세계대전 전승국 고문단의 간섭을 받았지만, ‘전략’과 ‘실용’을 바탕으로 미국·영국·프랑스와 힘을 합쳐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1952년 소련의 스탈린이 서독과 서방 세계에 제안합니다. 분단된 독일을 통일시켜서 중립국으로 만들자고요. 독일인에게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었죠. 남북한 통일시켜 중립국 하자고 하면 우리 국민 70~80%는 찬성할 겁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아데나워 총리는 소련의 흉계를 간파합니다. 통일 후 중립국 선언을 한다 한들, 지정학적으로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국익을 최우선으로 국민을 설득했어요. 자기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소신을 지켰죠.”

어떤 정책이 총리 자리를 날려버리는 것은 물론 소속 정당의 선거 패배를 초래하더라도, 그 정책이 국가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내하는 리더십. 김 동문은 이를 ‘거룩한 몸부림의 큰 정치’라고 부른다. 지지자들의 표를 잃거나 대다수 국민의 원성을 사더라도 꿋꿋이 소신과 철학을 지켜 끝내 온 국민의 공감을 끌어낸 사례는 또 있다. 4대 총리 빌리 브란트가 전개한 동방정책이 그것.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소련 및 동구권 국가와의 교류 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은 폴란드에 할양된 옛 독일 영토를 포기해야 정책적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 국민은 격렬히 반대했다.

“남의 나라에 할양돼 있어도 독일인들은 언젠간 되찾을 우리 영토라고 여겼습니다. 그 땅에 살다가 재산 빼앗기고 추방당한 사람이 엄연히 존재했죠. 그러나 옛 땅을 다시 찾겠다고 나서면 유럽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동방정책이 실효성 있게 진행될 리 만무했습니다. 브란트 총리는 영토 회복을 포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습니다. 서독 국민의 상당수는 그의 사죄에 호의적이지 않았어요. 독일 땅을 양보한 데 이어 지나친 행동이었다는 비난이 빗발쳐 여론이 무척 안 좋았죠. 그러나 브란트 총리의 소신 어린 사죄는 세계인에게 감동을 줬고, 전범국 독일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을 바꿔놨습니다.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자국민의 여론 또한 급반전했죠.”

여론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여론을 국익을 위한 자신의 철학과 소신으로 끌어당기는 독일 총리의 리더십. 브란트 총리의 정치 활동엔 큰 원리가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과 마찬가지로, 저것도 또한’을 적용하는 것이다. 브란트 총리는 양자택일식 결정은 대안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정치적 무능의 증거로 간주했다. 거대 양당으로 극화된 한국 정치 지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정당 체제는 필연적으로 연정을 도모케 한다. 총리에 선출되려면 연방 하원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해야 하는데, 구조적으로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 개의 당, 혹은 세 개의 당이 서로 연립해 총리를 선출하게 된다. 1957년 기민당이 51% 득표해 과반 달성에 성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당과 연정을 꾀했다. 아슬아슬한 의석으로는 국정 운영이 어렵겠다는 판단에서다.

“장관 자리 몇 개 나눠 갖는 게 연정이 아닙니다. 독일의 정당은 선거가 끝나면 연정 파트너인 상대 당과 일일이 정책 공약을 비교해가며 단일 공약을 만드는 협상을 합니다. 여러 현안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절충점을 찾아나가죠. 특정 정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1투표는 지역구에, 2투표는 정당에 투표를 한 후 정당 득표율에 맞춰 의석수를 조율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하원 의석이 600석 정도 되는데 이를 반으로 나눠 300석은 지역구, 300석은 비례대표에 할당합니다. 그런 다음 어떤 당이 5%를 득표했다고 가정했을 때 지역구에서 몇 명이 뽑히든 30석을 맞춰줍니다. 지역구에서 30석을 얻으면 비례에선 한 석도 안 주고, 지역구에서 한 석도 못 얻으면 30석을 몰아주는 식으로요.”

이런 선거 제도에선 소수 정당도 국민의 지지율에 비례해 의석수를 갖게 되며, 특정 정당이 의회를 독식하는 것 또한 방지할 수 있다. 철저히 분산된 권력, 대화와 타협으로 이뤄지는 독일 정치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날 포럼엔 본회 김종섭 회장, 이희범 명예회장, 모교 오세정 총장을 비롯한 동문 70여 명이 참석했다.


나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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