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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2022년 5월] 뉴스 본회소식

“문화 강국? 정책은 전문가, 생산은 온 국민에게 맡기면 된다”

조찬포럼 권영걸(응용미술69-76)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서울예고 교장
조찬포럼

“문화 강국? 정책은 전문가, 생산은 온 국민에게 맡기면 된다”
 
권영걸(응용미술69-76)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서울예고 교장

 
한국, 문화유산도 역량도 풍부
포용성 갖추면 강국 도약할 것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국민은 어느 나라일까요? 이스라엘?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1위는 홍콩입니다. 2위가 우리나라예요. 홍콩은 사실 중국의 특별행정구에 속하니까 국가로 따지면 한국 사람이 가장 머리가 좋습니다. 북한이 일본과 공동으로 3위를 했죠. 영국 얼스터대 심리학과 교수 리처드 린과 핀란드 헬싱키대 타투 반하넨 연구팀이 2003년 세계 185개국 국민 평균 지능지수(IQ)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문화 강국이 되는 세 가지 조건 중 첫째 ‘뇌력’ 측면에서 한국은 뛰어난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권영걸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이 4월 14일 본회 조찬포럼 연단에 섰다. ‘문화 강국의 길’을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 본회 김종섭 회장, 이희범 명예회장을 비롯해 동문 60여 명이 참석했다. 권영걸 동문이 제시하는 문화 강국이 되는 둘째 조건은 ‘원료’. 이는 전통문화,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문화적 인프라와 콘텐츠를 뜻한다. 셋째 조건은 뇌력으로 원료를 가공하는 ‘수단’ 즉 콘텐츠 가공 능력과 미디어 역량, 문화기술이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모두 문화 강국이었습니다. 국토 면적 세계 108위에 해당되는 작은 나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1위에 등재될 만큼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죠. 남북이 통일하면 10위권대 진입도 가능합니다. 또한 세계 237개국 가운데 자국어와 고유 문자를 보유한 나라는 20여 개국에 불과해요. 그중 하나가 대한민국이죠. 21세기 최고의 문화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 조건을 두루 갖췄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긴 호흡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암흑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류가 해외로 뻗어 나가고는 있지만, 눈에 띌 만큼 융성한 곳은 20개국 정도. 막강한 문화적 유산과 잠재력에 비하면 아직 충분히 발휘된 게 아니라는 지적이다. 

민족말살정책을 폈던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 이후에도 남북으로 갈려 갈등이 극에 달해, 북한은 문화예술을 국가의 소유물로 취급, 체제의 선전 도구로 활용했고, 남한에선 임화수 같은 정치 깡패가 정권의 비호 아래 연예계 및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등 문화계를 장악했다. 권 동문은 ‘문화 정책은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조언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잘 가고 있는 방향도 비틀어집니다. 비전문가가 오만 간섭을 다하기 때문이죠. 문화 정책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동시에 비전문가를 문화 향유층이자 생산층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중세에 들어 나타난 전문화된 예술가들이 공방을 차리고 유파를 만들어 문화를 생산했습니다. 고대엔 작가라고 할 것도 없었죠. 전문교육 자체가 없었고, 불특정 다수가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오늘날엔 다시 고대처럼 비전문화된 일반인들이 문화의 생산자로 부상하고 있어요. 유튜브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발전을 통해 말이죠.”

모교 미대 학장, 계원예대 총장을 거쳐 서울예고 교장으로 재직 중인 만큼 권 동문은 교육을 강조했다. 

문화 강국·창의 대국으로 가는 핵심 수단으로 교육을 꼽은 것. 국가의 문화예술교육이 국민의 창의성을 키우고 여기서 비롯한 상상력, 문해력, 문제 해결능력이 강대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고 강조한다. 권 동문은 “창의력은 그 자체로 삶의 질을 높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입시에 매몰돼 국어·영어·수학 같은 지식 위주의 교과목에 치중하지만, 선진국은 대부분 문화예술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전 국민을 예술가로 양성하려는 게 아니에요. 집안 형편 때문에 문화예술을 경험할 기회가 줄어들면 창의력이 저하되고, 이는 다시 삶을 피폐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무상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를 통해 빈민촌 아이들이 전혀 다른 차원의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들이 됐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사회적 효용이 입증된 셈이죠.”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한국인에겐 순혈주의, 배외주의가 강한 것. 강대국은 대부분 다민족·다인종·다문화를 특징으로 하며,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국제결혼이나 다문화 가정을 보는 시선이 지금도 곱지 않고 성 소수자, 난민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다. 관용 정신을 바탕으로 다원주의 사회가 될 때 창조적 문화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권 동문의 진단. 차별을 넘어 상생으로, 단일 민족 신화를 넘어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에 따르면 문화는 ‘다름’의 근원, 국가 정체성의 바탕이자 국가와 민족의 존재 기반이다. 

또한 문화는 사회를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해내는 동력이자 사회의 상징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힘이다. 그리고 문화는 경제 성과를 내기 위한 인프라이며, 오늘날 소프트 캐피탈리즘 시대에 경제를 견인하는 힘이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 예산이 2배 증가할 때 문화 예산은 7배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문화예술 경험은 오히려 줄어들었어요. 문화향유에도 양극화가 심해져 소득 상위 20%가 소득 하위 20%보다 7배 이상 많은 지출을 하고 있죠. 수년 전에 ‘저녁이 있는 삶’이란 단순한 캐치프레이즈가 큰 울림을 줬습니다. 그만큼 우리 국민이 여유가 없어요. 경영인의 눈엔 쉬는 날이 너무 많아 보이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적습니다. 문화예술을 즐길 시간을 주고, 문화 바우처를 지원해서 비용 문턱도 낮춰야 해요. 풍부한 문화예술 경험을 통해 전 국민의 창의력을 높이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에서, 매력적인 문화 선진국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