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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호 2022년 2월] 기고 에세이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유종해(법학50-54) 연세대 명예교수 에세이
동문기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유종해
법학50-54
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12월 11일 대학 동기와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집에 다 와서 급하게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다 우리 집 옆 길에서 넘어져 부상을 당했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청년의 도움으로 일어나서 사력을 다해 집까지 왔다. 그날이 토요일 오후라 병원에 못 가고 집사람이 준비한 진통제로 집에서 월요일까지 요양을 하는데, 어찌나 아픈지 기침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 나의 실수지만 스스로 불행한 자신을 원망했다.

반포의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늑골 5, 6, 7번이 골절됐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대단한 실망감으로 집에 와서 많은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지금까지 왔다. 

나는 일생 살아오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제법 여러 번 설교도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라고 하여 나와 언쟁을 했는데, 이유인즉 83kg의 거구가 왼쪽으로 넘어졌는데 다리와 팔의 골절이 없다는 것, 바른손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교적 건강하고 성인병도 없었는데, 이번 사고는 나에게 대단한 충격과 동시에 교훈도 주었다. 그렇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못 견디게 아픈 것은 10일 지나니 거의 없어지고 진통제도 아침 저녁 먹던 것을 아침 한 번으로 줄이게 되었다. 앞서 소개한 나와 아내의 에피소드는 내가 잘못이고 아내의 말이 옳았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둘째 기쁜 일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셋째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가만히 보면 받기만 하는 사람, 묻는 말에만 답하는 사람, 묻는 말에도 답도 안 하는 사람, 서로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사람 등이 있다.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는 사람은 시간이 남아 돌아서 보낼까? 그렇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부모님의 은혜, 배우자, 자녀, 벗들에 대한 고마움 등은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지만 늘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감사는 절대로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반드시 겉으로 표현돼야 한다. 그렇게 표현될 때 비로소 서로간 기쁨과 행복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어느 지역 신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사로 났다. 어느 회사의 전무인 40대 남자가 혈압으로 쓰러져 그만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매일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면서 짜증과 불평 불만으로 옆에서 수발을 드는 부인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한 친구의 문병을 받고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신세타령과 불평, 불만만 하지 말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도움을 준 사람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보라고 권면했다. 처음에는 감사할 조건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짜증만 났고 부인도, 자식도, 친구들도 고맙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날을 회상하는 가슴 속에 뭉클한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여선생님의 생각이었다. 그는 당시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도, 늘 담임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셔서 용기를 얻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고,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해 취직,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릴적 그 여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그 선생님이 계신다는 양로원의 주소를 찾아 간단한 사연을 편지로 썼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월리인데 지금 반신불수가 돼 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생애에 있어서 둘도 없는 은사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감사의 글을 드리지 못하고 무심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중략).” 

이 선생님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홀로 양로원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날 편지 통에서 이 편지를 받고,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답장을 썼다. 

“사랑하는 월리군! 내 평생 수많은 어린이를 가르쳤지만 고맙다고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낸 제자는 자네밖에 없었네. 이제는 늙어서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이 노친네를 자네는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었네! 내가 자네의 편지를 눈물로 읽은 것을 아나? 나는 자네 글을 침대 옆에 놓고 매일 밤 한 번씩 읽는다네. 그리고 읽을 때마다 그 편지를 어루만지면서 자네에게 감사하네. 이 편지가 내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아는가? 내 생에 새로운 희열과 기쁨을 용솟음치게 해주었네. 나는 자네의 편지를 내 교직 생활의 유일한 보람으로 알고 내가 죽는 날까지 간직하려 하네.”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삶의 용기를 찾았고 걷는 연습을 했다. 말하는 연습을 했고 재활운동에 사력을 다한 결과 건강이 점점 좋아져 다시 복직하게 되었고, 사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만큼 잘 알려진 말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정작 행동으로 옮기려면 참으로 어렵다. 그 까닭은 바로 이 구절 중 ‘범사’라는 말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큰 사고를 당했거나 난치병으로 사경을 헤맸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생명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본이 진정으로 닦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