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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021년 10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14곳에 1330m 벽화…쓰레기 사라지고 동네가 달라지더군요”

원로에게 듣는다-김경한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
“14곳에 1330m 벽화…쓰레기 사라지고 동네가 달라지더군요”

김경한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 (전 법무부 장관)




올해 본회 관악대상을 수상한 김경한(법학62-66)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은 평생을 범죄와 싸우며 대한민국의 법치를 지켜온 동문이다. 2009년 법무부 장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후 법률자문을 해오다 2014년부터 한국범죄방지재단을 맡아 이 일에 매진해오고 있다.

검사 시절 범죄자를 잡는 일에 몰두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범죄자를 한 사람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재소자나 우범자를 찾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합창단을 조직하고, 전국 수용시설에 양서도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또 정기적으로 관련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전문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후미진 우범지대 곳곳에 밝은 벽화를 그려 넣는 사업도 한다.

지난 9월 27일 서울 여의도 한국범죄방지재단에서 김 동문을 만나 그동안 살아온 삶과 법조계 원로로서 검찰개혁에 대한 생각 등을 청해 들었다.


2014년부터 재단 맡아 범죄 예방 앞장
“검찰개혁, 거악 단속에 심각한 혼선 조짐”

독문학 하고 싶었으나 집 사정 생각해 법대로
문학 잊지 못해 마음 울린 문장 적은 노트만 10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일생을 바쁘게만 살다가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부터는 시간적으로 좀 여유를 찾게 됐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젊은 시절 스스로를 옥죄던 자의식이나 집착 같은 것이 많이 줄어들어 사람이 좀 헐렁해지고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늙는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2014년부터는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을 맡게 되어 반쯤은 다시 매인 몸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어느 정도 규칙적인 생활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문학에 심취하셨다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청상에 홀로 되신 숙모님께 입양되어 평생을 양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외롭게 자란 거지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항시 혼자서 책 읽고 갖가지 공상을 하면서 지냈어요. 중학교 시절부터는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호메로스나 단테를 포함해 소설들과 시집들을 통독하고, ‘현대문학’ 같은 월간지도 빠짐없이 구독했습니다. 특히 청마 유치환의 시를 좋아해서 그때까지 발간돼 있던 그의 시집 9권을 모두 암기할 정도였습니다. 백일장 같은데 나가서 가끔씩 상도 받고 친구와 셋이서 작은 시집을 낸 적도 있습니다. 가장 특기할 일은 그 시절 고고생 문학 서클에서 눈동자가 유난히 맑은 한 여학생을 만났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녀가 바로 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문학은 떠났어도 사랑은 남았네요(웃음). 이사장님의 대학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1960년대의 대학생들은 대개 가난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젊음의 낭만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당시 법대생들 간에는 대학시절 할 일을 세 가지 독일어로 요약하였는데, trinken(음주), lieben(연애), studieren(공부)이 그것이지요. 많은 학생들이 이를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술은 학교 근처 선술집에서 주로 막걸리를 마셨지요. 나올 때 돈이 없으면 시계나 법전 같은 것을 맡기곤 했어요. 법대생의 경우 연애는 아주 소수의 친구들만 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가끔 학생회 같은 데서 단체 미팅을 주선해 같은 번호표를 가진 남녀 학생을 짝지워 주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부라면 법대생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대부분 고시 공부에 몰입했는데, 도서관파, 산사(山寺)파, 학교수업파 등 여러 형태로 공부했어요. 그리고 당시 대학에는 위 세 가지 외에 추가로 한 가지 중요한 활동이 더 있었는데 바로 시위입니다. 당시 6·3 사태 등 현안들이 모두 학생 시위로 연결되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시위가 벌어졌고 동숭동 대학가는 그때마다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지요. 검거되면 대개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어 하루 이틀 조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시위는 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고 더러는 민족주의 색채를 띠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성격이 비교적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졸업 후 한참 있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검사가 되겠다고 생각하신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고등학교 시절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1학년 때부터 특히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이에 재미를 붙인 나머지 독문학과를 지원할까 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집 사정도 넉넉지 못한데 당시는 문학으로는 밥 먹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자수성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어서 법대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법대로 간 이상 사법시험은 필수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희 때는 매년 워낙 소수의 인원만 뽑았기 때문에 두세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가 11회 사시에 이르러서야 33명의 합격자 명단에 겨우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검사가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더 멋지게 보여 망설이지 않고 그쪽을 선택했고, 그로부터 30여 년간 앞뒤 재지 않고 검찰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격동의 시대에 검사로 살아오셨는데, 보람된 일과 아쉬웠던 일이라면.
“검사가 된 후 주로 서울에 있었어요. 검찰과 법무부의 여러 부서에서 일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 특히 80~90년대에는 공안 분야에서 많이 근무했지요. 그 무렵부터 운동권은 단순한 민주화 투쟁의 범위를 넘어 점차 좌경화 색채를 띠기 시작했는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전통적 PD계열이 약화되고 NL그룹이 학생 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그 일부는 소위 주체사상과 결합하여 친북 성향까지 띠게 되었습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386’(지금의 586)이지요. 그 무렵 공안검사들은 나름대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검사실에서 법정에서 밤낮없이 뛰었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안검사들은 ‘권력의 시녀’ 운운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고, 더욱이 좌파 정권의 등장으로 공안검찰은 약화일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반면에 당시의 386들은 점차 운신의 폭을 넓혀가 급기야 정계를 비롯한 각계의 핵심에까지 등장하게 되었지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공안검사로서의 보람과 아쉬움이 함께 남는 장면입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어온 검찰개혁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소위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검찰개혁이라는 것은 ‘검수완박’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한 마디로 검찰의 무력화 과정입니다. 저는 그들의 목표가 어디까지이며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날 검찰에 때때로 크고 작은 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검찰은 건국 이래 70년이 넘도록 법적 전문성과 인권의식을 가진 전통적 사정기관으로 중요범죄 내지 거악(巨惡)의 응징에 나름대로 역할을 해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검찰개혁을 논한다면 지난날 검찰에 허물로 지적된 부분, 예컨대 검찰에 정의롭지 못했던 부분, 공정하지 못했던 부분, 민주적이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마치 유능한 외과 의사처럼 이런 부분만을 정확히 가려 정교하게 도려내면 족할 것입니다. 검찰을 속속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헌칼 쓰듯 여기저기 마구 쑤셔보고 마구 잘라내고 하는 식으로 추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검찰의 긍정적 순기능마저 몰각되고 국가의 여러 수사기관 간에 스텝도 꼬여버립니다. 벌써 거악의 단속에 심각한 공백이나 혼선이 생길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검찰개혁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깊이 유념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화제를 좀 바꿔 보지요. 한국범죄방지재단의 이사장을 맡으신지 7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던 사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면?
“저희 재단은 1994년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께서 창립하신 민간 공익법인 입니다. 정 이사장께서 오랜 세월 재단을 잘 이끌어 오셨는데 지난 2014년 창립 20주년을 계기로 제가 그 직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재단의 책임을 맡으면서 종전에 주력해 오던 학술적 사업을 계승하는 한편 현장에서의 실천적 활동을 많이 강화해 오고 있습니다.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우범지역 환경 개선을 위하여 학교 주변 등 길고 후미진 골목 담장에 밝은 벽화를 그려 넣는 활동을 5년 째 계속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곳에 총 연장 1,330미터의 벽화를 완성하였으며, 학생과 주민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전문 용역을 주어 교도소나 구치소 수용자들이 좁은 감방에서 활용할 수 있는 특수체조를 개발·보급하였는데 전국의 수용시설에서 조석으로 TV 화면으로 방송되는 시범에 따라 각 방의 재소자들이 일제히 따라함으로써 그들의 심신수련에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에 매년 1,000여권의 양서를 엄선하여 보내주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재소자들로 구성된 합창단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합창은 참가자들의 심성과 정서를 순화해줄 뿐만 아니라 다수가 화음을 이루어야 하므로 절제와 규율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저희 재단에서 2016년부터 소년원 또는 교도소를 선정하여 그 수용자들로 합창단을 구성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 합창단은 가수 윤형주 씨가 단장을 맡고 단국대 전병곤 교수(바리톤)가 주 2회 직접 시설에 가서 지도하고 있는데, 지원자가 많아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선발합니다. 그간 일반 재소자들과 내외부 인사를 초청하여 공연도 한 차례 하였습니다. 다만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연습이 일시 중단되고 있어 모두 재개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대는 끊임없는 사회적 비판과 그 무게 만큼의 기대를 받아 왔습니다. 서울대가 앞으로 어떤 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서울대생은 머리는 좋은데 결속력이 부족하고 다분히 이기적이며 개인 플레이를 위주로 한다는 등의 비판이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에 수긍되는 점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저는 완전히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기적이라 할 만큼 단기간에 민주화와 압축성장을 이룩함에 있어서 서울대인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였습니다. 각계에서 활동하는 서울대인들의 노력의 총화가 바로 서울대의 힘인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에서부터 BTS나 ‘기생충’ 등 예능 분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분야도 많은데, 서울대가 세계 대학 중에 선두권을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수와 학생, 졸업생 모두가 국내의 기득권 의식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개혁 마인드로 무장하여 좀 더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언젠가는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취미생활과 평소 건강관리에 대하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간 나는 대로 여행과 등산을 즐기고 가끔 골프도 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한 달에 3~4권 이상의 책을 꾸준히 읽고 있으며,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으면 그때마다 노트에 옮겨 써놓곤 하는데 그 노트가 10여 권에 이르러 시간 날 때 펼쳐보기도 하고 외부 특강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인용하기도 합니다. 건강을 위해 새벽에 눈을 뜨면 30여 분간 자리에 누운 채로 제가 스스로 개발한 스트레칭과 마찰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좋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전에 헬스클럽에 가서 유산소 운동과 기구 운동을 계속하며, 매일 1만 보를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정리=김남주 기자


대담 : 오정환 (공법83-87) MBC 부장



김 동문은
1966년 모교 법대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법시험(제11회) 합격 후 1972년 검사로 임관해 법무부 교정국장, 법무부 차관, 서울고검장 등을 거쳐 제60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재임 당시 전국적으로 ‘법질서바로세우기운동’을 전개, 언론에서 ‘미스터 법질서’로 호칭됐다. 매년 검사 임관식에 등장하는 ‘검사 선서문’도 그의 작품이다. 퇴임 후 변호사 활동 대신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봉사하며 범죄 예방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밖에도 재)관악회에 장학기금, 법대 동창회장으로 재임 당시 법대 교정에 이 준 열사 동상 건립비로 1억원을 출연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발전후원회와 발전기금 등에도 수시로 다액을 기부해 왔다. 제23회 관악대상,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과 명예로운 안동인상, 천고법치문화상 등을 받았다. 현재 법대동창회 고문이자 본회 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