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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호 2021년 1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폭풍처럼 지나온 날들 인성의 중요함 깨달았다

이용태  박약회 회장·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인터뷰
원로에게 듣는다
 
폭풍처럼 지나온 날들 인성의 중요함 깨달았다
 
이용태  박약회 회장·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이용태(물리53-57) 동문은 한국 벤처산업의 전설로 불린다. 그가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PC) 사업과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 등은 국내 IT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됐다. 그러나 2005년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파산까지 하는 부침도 겪었다. 

70대 중반에 맞은 부도로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걱정의 눈길이 많았지만, 이 동문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이로운 활동을 재개했다. 부와 명예를 모두 잃었지만, 명상과 공부를 통해 그것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박약회(博約會) 회장으로 전 국민 인성교육에 매진한 지 15년. 최근 ‘행파(杏坡)한시집’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벤처 원로의 근황이 궁금했다. 12월 6일 서울 종로 박약회 사무실에서 이용태 동문을 만났다. 


-일반 시 한 편 짓기도 쉽지 않은데, 600여 쪽의 한시집을 내서 놀랐습니다. 
“어릴 때 한문이 일상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우리말 배우는 것과 동시에 한문을 배웠죠. 옛날에 글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썼던 것이 시입니다. 글 쓸 때 감정을 함축적으로 담으면 시가 되는 거지요. 저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으신가요.
“원래 약골 중 약골이었어요. 병주머니라고 불릴 만큼 갖고 있던 병도 많았고요. 간경화, 당뇨, 혈압…. 그런데 명상, 채식 위주의 식습관, 남을 위해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게 건강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밥, 빵, 떡, 국수 등은 거의 먹지 않고 100g씩의 채식과 올리브유 15숟가락을 매일  먹습니다. 매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스트레칭을 3분씩 하고요. 70대 이후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해 간경화가 없어지고 B형 간염도 사라졌어요.”
 
이 동문은 우리나라 전자정부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UN이 2년마다 전 세계의 전자정부 순위를 발표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최상위권에 뽑힌다. 1위를 기록한 해도 수없이 많다. 과학기술이 세계 최상위권도 아니고 더군다나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도 아닌데, 어떻게 지금과 같은 성과가 가능했을까?

“1980년대 미국 실리콘 밸리에 벤처 비즈니스가 시작될 때예요. 사실 저는 국가 주도로 3000만 달러 수준의 벤처캐피털을 만들어 미국의 유망 벤처기업 30여 개에 투자하는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중 10개만 잘 돼도 한국이 최첨단 선진국으로 가는 기초가 마련되는 것이니까요. 실제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재무부를 설득해 800만 달러까지 마련했고요. 우리가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차원이 다른 발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오 명 차관으로부터 새로 설립될 데이터통신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벤처캐피털을 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거절하는 뜻으로 파천황의 제안을 했습니다. 정부 전체의 행정전산을 준다면 해 보겠다고요. 그때 정부가 받기 매우 어려운 조건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전 부처의 일을 우리가 알아서 전자정부(e-Government)로 만들고 요금은 나중에 청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그 조건을 받아주겠다는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데이컴 설립을 맡았습니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보다 10년 앞선 미래기술을 채택하고 국산 컴퓨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정말 목숨 걸고, 밤낮 자지 않고 일했어요. 어느 선진국보다 기술적으로 앞선 전자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죠. 지금 민원처리가 얼마나 편리하게 이뤄지고 있습니까. 금융실명제도 그런 바탕 위에 가능했던 거고요. 제 인생의 큰 모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것처럼 IBM을 도입했으면 쉽게 될 일을 10배 더 고생하면서 누구도 안 해본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낸 젊은 엔지니어들과, 잘못되면 큰 책임이 돌아올 것을 감수하고 이런 결정을 받아낸 오 명 차관에게 정말 큰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전자정부·서울 교통시스템 구축
초고속 인터넷 망 초석 다져
질주하던 사업, 상황 변하며 눈물
인성교육 전도사로 인생 2막
명상·채식 생활화로 건강 유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견줄 빅 프로젝트였네요.
“그렇죠. 사실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나 북유럽의 작은 나라들은 우리를 따라 온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도 그런 나라가 전자정부 순위에서 우리를 가끔 앞설 때가 있고요. 우리와 같은 인구 규모인 나라에서 저같이 바보같고 용감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서울시 교통신호 시스템도 회장님 작품이라고요?
“1970년대 후반,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할 때였어요. 서울시에서 교통신호 전산화 프로젝트를 발주해 해외 6개국으로부터 입찰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친구가 서울시에 있어서 우리 연구소도 참여하고 싶다고 했어요.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검증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해외 업체에 맡기면 추후 관리비도 상상할 수 없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에게 맡기면 일자리도 창출되고 국산화했다는 자부심도 생기지 않냐. 전자기술연구소를 이런 일 하라고 만든 거 아니냐. 기술이 의심된다고 모든 것을 해외에 맡기면 우리 같은 국책연구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설득했죠. 

그전까지만 해도 신호등 시스템이 아날로그 방식이었죠. 정해진 시간에 삼색등이 차례로 들어오는 식이었어요. 주변 도로 상황과 전혀 연계가 안 돼 교통 흐름이 나빴죠. 결국 서울시를 설득해서 우리가 컴퓨터로 제어하는 시스템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1978년 교통 흐름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서울 시내에 적용할 수 있었죠. 한 번도 만들어본 일이 없는 우리에게 큰 모험을 감수하고 그 일을 맡겨 줬던 김명년 부시장의 애국심과 용기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요.”

-기술연구소에 계시다가 삼보컴퓨터를 창립하게 된 동기는 어떻게 되세요.
“1969년 말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그 무렵 인텔에서 반도체 칩이 개발됐어요. 이 칩을 잘 활용하면 유용한 제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에선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도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연구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부에 건의를 했어요. 컴퓨터 생산 기지를 만들자고. 흥미롭게 듣긴 하는데 움직이지는 않아요. 10년 가까이 정부를 설득해도 통하지 않아서 직접 나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삼보컴퓨터를 설립했죠.”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개척한 이 동문은 1996년에 두루넷을 설립, 초고속 인터넷 시대를 여는 데도 앞장선다. 두루넷은 한전이 갖고 있던 통신망을 활용해 초고속 인터넷망을 신속히 구축했다. 한전이 갖고 있던 CATV용 동축케이블로는 고속통신이 안 된다고 하던 KT가 두루넷의 성공을 보고 원가에도 불구하고 동일 가격으로 뛰어들고, 아무 할 일이 없어 공중분해하기로 돼 있던 하나로도 원가를 무시하고 동일 요금을 제시하면서 뛰어들었다. 이렇게 낮은 가격으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제일이 될 수 있었다.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루넷은 나스닥에 상장된 국내 첫 기업이었습니다. 당시 두루넷의 시가 총액이 현대차와 LG전자를 합한 것과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한전이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고 통신 자회사를 만들었어요. 우리가 한전 선로를 이용해 사업을 하는데, 자회사 통해 사업을 한다는 거예요. 이런 소식이 월스트리트저널에 나간 후 주가가 대폭락합니다. 보증을 섰던 삼보컴퓨터도 같이 망해버린 거죠.”

-충격이 컸을 텐데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죠. 사회적 지위도 다 잃어버리고. 어떤 친구는 미안해서 찾아오지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오래전부터 인성교육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 회복 탄력성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 왔어요.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한 겁니다. 명상을 많이 했습니다. 잡념을 털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했죠. 명예, 부는 내 인생의 10%밖에 안 되는 양복 같은 것인데,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낙심만 해서야 되겠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5년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이 회장은 박약회 활동에 매진한다. 박약회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인성교육을 펼쳐나가는 단체다. 현재 이 동문은 파란만장했던 지난 날을 뒤로하고 인성교육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삼보컴퓨터를 하면서도 저는 삼보의 일보다는 우리나라를 선진국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정보산업연합회를 통해서 정부에 부단히 정책건의를 했고 강연 기고 등 정보화 사회에 대한 계몽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업에서 물러난 뒤는 인성교육을 통해 우리나라를 도덕 수준이 높은 진정한 선진국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바치고 있고요.”


관악보주 장찬광/문군지명 일수행
일재막사 비사사/우세수연 발숙향
 
관악산 값진 구슬 밝은 빛을 간직했구나/묻노니 그대의 사명을 알고 날마다 수행하고 있는가?/그대 뛰어난 재주 사사로운 일에만 쓰지를 말고/세상을 위해 깨끗하게 맑은 향기 발하라
- 이용태 동문이 후배들을 위해 지은 한시 
 
-인성 교육이란 게 막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성 교육은 사실 인류 역사이래 계속돼 온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안 될까요? 고민 끝에 방법을 찾았어요. 그게  HPM(Habitual Practice Model)입니다. 3가지 원칙과 6가지 방법론이 있는데 첫 번째 원칙이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다 ’란 겁니다. 자식을 훌륭한 인격자로 키워야 한다고 하면 조금 막연한데 훌륭한 습관을 길러주겠다고 하면 조금 실체가 보이지 않습니까? 각 가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을 정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실천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 번에 여러 덕목을 강조해서는 절대 안 되고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벤처 1세대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지금 세상의 가장 큰 특징이 급변입니다. 빠른 변화죠. 코로나도 하나의 급변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빅 프로젝트 개념입니다. 그 좋은 보기가 전자정부(e-Government) 프로젝트입니다.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문제, 앞으로 닥칠 문제들에 대해 빅 프로젝트를 우선 정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과감하게 미래기술을 도입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회장은 마지막으로 동창회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가 자연대 초대 동창회장을 했어요. 당시 총동창회 부회장을 했고요. 관악대상도 수상했습니다. 저는 회비를 꼬박꼬박 냅니다. 기업 할 때 잘되면 도중에 기부할 생각이 컸는데 하늘이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서울대 동문들은 로열티를 내야 합니다. 평생 덕을 보고 살아왔는데요.”           
정리=김남주 기자



대담 : 김의구(철학80-84) 국민일보 논설위원
 


프로필
△1933년 경북 영덕 출생(재령 이씨 영해파 19대 종손) △영덕농업고 졸 △문리대 신입생 대표선서 △유타대 물리학 박사학위 △이화여대 교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장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1980년 삼보컴퓨터 설립 △미디어밸리 추진위원장(인천 송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자연대동창회장 △재단법인 정보문화센터 이사장 △두루넷 사장 △제27대 숙명학원 이사장 △전경련 부회장 △미국 유타대 한국동창회장 △도산서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