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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021년 6월] 뉴스 본회소식

신영균, 김경한, 서정선 동문 관악대상 수상소감

수상소감 전문

관악대상 수상자 3인 수상소감 및 공적 


6월 11일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관악대상 시상식에서 (왼쪽부터) 관악대상 수상자 서정선·신영균·김경한 동문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원로로 소임 다하겠다”

신영균 (치의학48-55)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수상소감

제 나이가 93세인데, 이런 원로에게 이 영광스러운 상을 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치과의사, 더군다나 서울대 나온 치과의사가 어떻게 영화배우가 됐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을 안 가고 영화배우만 하려고 배우 생활을 하다가, 미래가 안정치 않은 것 같아서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서울대 치대에 들어왔습니다.

정말 노력하고 애를 써서 졸업을 하고, 병원까지 개업했습니다. 그런데 가정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배우가 또 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더군요. 마침 좋은 시나리오 한 편을 받아 집에 돌아와서 제 아내에게 한 작품만 배우활동을 하겠다, 이해해 달라 했습니다.

아내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서울대 나온 치과의사라서 결혼했지, 딴따라 같으면 내가 당신하고 왜 결혼하겠냐’고요. 그러나 ‘한 작품만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안 하겠다, 스캔들 같은 건 절대 일으키지 않겠다’고 저는 사정했습니다. 그렇게 약속한 지 금년이 69년입니다.

영화배우의 아내로서, 치과의사의 아내로서 아마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 많이 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아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원로로서, 서울대를 나온 치과의사로서 , 서울대총동창회 동문으로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마무리 잘 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동문님들도 마음 속으로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동문님들 모두 앞으로 건강하시고, 가정이 다같이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공적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한국 영화의 아이콘이다. 1955년 모교 치대 졸업 후 치과의원을 운영하던 중 1960년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마부’, ‘연산군’,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3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재단법인 신영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해 명보극장,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상당의 사재를 사회에 기부했다. 단편영화 창작 지원 및 영화인 자녀 장학사업 등을 통해 문화예술 인재를 양성했다. 15·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문화예술계 발전을 위해 입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대종상 영화제 공로상 등을 받았다. 현재 본회 고문을 맡고 있다.




“30년 검찰 생활, 이젠 범죄 예방 활동이 전업”

김경한 (법학62-66)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





수상소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 모로 부족한 제가 총동창회로부터 이처럼 귀한 상을 받게 되어 우선 부끄럽고 또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고 기쁜 마음 또한 숨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상이 사랑하는 동문들이 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소중한 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먼저 저를 뽑아주신 총동창회의 이희범 회장님과 관악대상 운영위원회 문용린 위원장님, 그리고 모교의 오세정 총장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추천해 주신 법과대학 동창회 우창록회장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따뜻한 박수로 축하를 해주시는 동문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 장면을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이크 잡은 김에 평생을 저 하나를 믿고 따라준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모처럼 저의 살뜰한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서울대학교가 어떤 대학입니까? 동문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는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는다면 고개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정말 그렇습니다. 관악이 배출한 인재들이 요로요로에서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서울대」라는 브랜드는 언제 어디서나 멋지게 잘 통하는 그야말로 최고의 브랜드였습니다. 제가 여태껏 살아가면서 사회에 작은 기여나마 할 수 있었다면 이것도 대부분 그 덕분이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서울대와 동문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으며, 이 점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 10여년 전 공직을 물러날 때까지 30여 년간을 검찰에 봉직해 왔습니다. 검찰은 저에게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검찰이 소위 「검찰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난날 검찰에 크고 작은 여러가지 허물이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건국 이래 7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검찰은 국가의 중추적 수사기관으로서 중요범죄의 수사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던 점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검찰을 개혁한다면 검찰의 그러한 허물들, 이를테면 「정의롭지 못했던 부분」,「공정하지 못했던 부분」,「민주적이지 못했던 부분」등 악성 환부만을 골라, 유능한 외과의사처럼 정교하게 도려내야 할 것입니다. 무딘 부엌칼 같은 것으로 이곳저곳 마구 쑤셔보고 마구 잘라보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써부터 과거 검찰의 긍정적 기능마저 크게 손상되거나 무력화되어버리고, 나아가 여러 국가 수사 기관 간의 스텝이 꼬여버린 나머지 「거악」의 응징에 심각한 공백과 왜곡이 생길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얼씨구나 하며 거악이 발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 검찰개혁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상식과 순리가 무엇인지 원점에서 다시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무작정 밀어부치다가는 자칫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여 년 전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결론이 「어차피 30년간 범죄로 밥벌이(?)를 해 왔으니 이 주특기를 살려나가는 수 밖에 없다」─. 다만 과거에는 어떻게 하면 범죄자를 한사람이라도 더 잡아들일 것인가라는 쪽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범죄자를 한사람이라도 줄여볼 것인가라는 쪽으로 그 중점이랄까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하는 몇 개의 조직과 운동에 하나둘 관여하다 보니 발목이 깊이 빠져 어느새 그것이 저의 전업이 되어버렸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재소자나 우범자를 찾아 인간적인 대화도 나누고, 운동이나 노래도 함께 하고, 전국 수용시설에 좋은 책도 꾸준히 공급하고 있습니다. 또 정기적으로 관련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전문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후미진 우범지대 곳곳에 밝은 벽화를 그려넣는 등등의 사업도 합니다. 그런 일에서 나름대로 제법 쏠쏠한 재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세월이 참 빠릅니다. 어어하는 사이에 어느덧 희수의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꿈과 이상을 논할 그런 연치는 아득히 지나가버린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의 과분한 수상을, 마치 젊은이처럼 다시 한번 저의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존경하는 동문 여러분들의 변함 없는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적

1966년 모교 법대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법시험(제11회) 합격 후 1972년 검사로 임관해 서울지검 부장검사, 법무부 교정국장, 법무부 차관, 서울고검장 등을 거쳐 제60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재임 당시 ‘법질서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쳤으며 초임 검사 임관식에 활용되는 ‘검사선서문’을 작성했다. 퇴임 후 변호사 활동 대신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무보수로 봉사하며 범죄 방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법대동창회장으로 재임 당시 법대 교정에 이 준 열사 동상 건립비로 자비 1억원을 출연하는 등 모교를 물심양면 지원했다. 재단법인 관악회에도 1,000만원을 쾌척했다.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과 명예로운 안동인상, 천고법치문화상 등을 받았다. 현재 법대동창회 고문이자 본회 고문이다.





“세계 게놈연구 거점 된 모교, 자부심 느낀다”

서정선 (의학70-76) 분당서울대병원 연구석좌교수





수상소감

안녕하십니까. (오늘) 최연소 수상자인 서정선입니다.
먼저 서울대 동문들이 주는 의미 있는 큰 상을 주신 총동창회 이희범 회장님과 서울대 오세정 총장님, 그리고 문용린 운영위원장님을 비롯한 열세 분의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추천해 주신 신찬수 의대 학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저의 칠순 생일인데, 이런 큰 상까지 받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51년 전 1970년에 문리대 의예과에 입학했습니다.
봄이면 대학천 미라보 다리 양 옆으로 샛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1976년 의대를 졸업하고, 1980년 생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군 병원에서 3년간 근무하여 해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1983년에 교수로 임용되어 2017년 정년을 했습니다. 미국 록펠러대학에서 보낸 2년과 국방부 서울지구병원 3년을 제외한 46년을 서울대에서 보낸 셈입니다.

가끔 저는 생각해 봅니다. 
나는 왜 임상의학, 특히 내과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기초의학을 선택했을까.
그 중엔 선친의 영향도 큰 것 같습니다. 선친께서는 기생충학자로서 서울의대에서 30여 년간 기초의학자로서 외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좀 오기를 부린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지요. 사실 90년대까지 오기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뤘지요. 

60년대를 풍미한 소설로 최인훈의 ‘광장’이 있습니다. ‘광장’ 서문에 이 말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많은 풍문이 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우리는 그곳에서 운명을 만난다.
우리는 그곳을 광장이라고 한다."

70년대 후반에 제가 들은 풍문은 ‘DNA가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최인훈 작가의 말대로 이 여정 중에서 나의 모든 인연과 운명을 만나게 된 셈입니다. 

나의 은사이신 일천 이기영 교수님께서는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1955년 미생물DNA로 박사를 받으시고, 귀국해서 서울의대 생화학교실에서 DNA연구를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1976년 이 교수님 실험실에 마지막 제자로 입문해서 2009년 북방계 아시아인 게놈을 분석하여 첫 번째 Nature 논문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2011년 인간게놈계획 10주년 기념으로 네이처지가 선정한 37편의 게놈연구 중요논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서울의대 역사상 처음으로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 두 번째 네이처 논문을 출판하였습니다. 북방계 아시아인 표준게놈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신생 조립방법으로 만든 최초의 인종별 표준게놈입니다. 
네이처지는 논문 출간일에 프레스 릴리즈를 통해 '현재 발표된 게놈 중에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게놈'이라는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The most contiguous genome so far'라는 찬사를 당일날 홍보자료로 전 세계 언론에 뿌려주었습니다.

2019년 퇴임 후 서울대 분당명원 소속으로 세 번째 네이처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이 논문은 네이처 겉표지 논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최근까지 저는 네이처와 네이처 자매지에 17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저는 일천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서울의대에 일천 유전체의학연구소를 창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20년간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의 제자면서 이제는 학문적인 동료이기도 한 김종일 소장이 이끄는 일천연구소는, 아시안 게놈 연구의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일본와 중국의 엄청난 파워를 물리치고 서울대가 세계 중요 게놈 연구의 거점이 된 것에 기초의학 전공자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1997년 마크로젠이라는 한국의 최초 바이오벤처가 서울의대 일천연구소에서 출범했습니다.
당시 매출이 10억도 안 되는 회사가 현재 1,300억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에 있는 현지법입의 매출 합계가 700억 가까이 됩니다. 160개국에 1만8,000명의 고객이 있습니다.
마크로젠은 이제 글로벌 기업이 되었습니다. 마크로젠은 나의 '브레인 차일드(brain child)'입니다. 
앞으로 개인의 DNA 설계도를 분석해서 미래 질병예측을 하기 위한 빅데이터 사업을 통해 인류에게 공헌하고자 합니다.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길이 운명이 되고, 이제 제 나이도 70이 됐습니다.
그동안 실험실을 같이 지켜준 나의 학생들, 포닥,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내와 딸 부부, 손자 모두 6명인데 어린 손자들을 빼고 모두 서울대 동문입니다. 
서울대 분당병원 진단검사과 조교수인 딸 수현과, 서울대 본원 성형외과 부교수인 사위 김병준, 손자 민성, 현성이까지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41년 동안 저와 동고동락한 제 안사람 은화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적

1983~2017년 모교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유전체분석 분야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SCI급 논문 180편 이상을 발표해 1만 회 이상 인용됐다. 인간의 전체 유전자 구조를 밝히는 게놈 연구를 네이처와 자매지에 17차례 게재했다. 2009년 세계 최초 고해상도 북방계 아시아인 게놈 분석, 2016년 세계 최고 정확도 한국인 표준 게놈 지도 완성, 2019년 아시아인 유전체 분석 연구 등이 그 중요성과 정확도를 인정받았다.

1997년 모교 유전체의학연구소를 모태로 인간 유전체 정보 및 데이터 분석 기술을 보유한 마크로젠을 창업해 매출 1,300억원 이상, 160개국 1만8,000명의 고객을 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회사 주식 상당 부분은 모교에 기증해 후배 의학도의 유전체 분석 교육을 지원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자 공우생명정보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