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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021년 5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빚 갚는 심정으로 의료·교육·문화 사업 해왔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 인터뷰



“빚 갚는 심정으로 의료·교육·문화 사업 해왔다”

이길여(의학51-57) 가천대 총장


의사 이길여(의학51-57)의 사회적 첫 걸음은 1958년 이길여 산부인과로 출발했다. 길병원과 가천의대 설립으로 이어지는 성공신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성공 신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로서의 따스함이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입원 보증금 안 받는 병원’을 만들고 ‘환자를 품에 안으며 치료해 주던 의사’가 이길여 동문이었다. 의사 없는 마을은 있을 수 없다며 철원과 백령도의 문 닫는 병원을 떠안았고 돈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며 사회복지법인 ‘새 생명 찾아주기 운동 본부’를 설립했다. 옛 경기 간호학교였던 경기전문대학을 1994년 인수한 데 이어, 1998년에는 경원대를 인수했다. 2012년에는 가천의대와 경원대를 통합해 학생 수 기준 수도권 3위 규모인 가천대가 출범했다.

의술과 교육을 향한 이 동문의 열정이 만들어낸 결정체가 ‘가천 길재단’이다. 환자에 미친 의사, 제자에 미친 교육자의 삶이 한 켜 한 켜 녹아들어 있다. 이 동문은 스스로를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라고 칭했다. 바람개비를 움직이게 한 에너지는 무엇이었고,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번 인터뷰는 그 바람개비의 삶에 관한 조명이었다.


대담·글 : 방문신 (경영82-89) SBS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의사’의 길을 걷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중학교 6학년(현 고3) 때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을 거예요. 동네에 전염병이 돌면 몇 사람이 죽어 나가고, 굶주려 죽는 사람도 너무 많았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돼야겠다는 꿈을 키웠지요. 6·25 전쟁에 남자 친구들은 나라를 구하겠다고 입대해 거의 살아서 못 돌아왔죠. 너무 미안했어요.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1958년 이길여 산부인과 개원 때부터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 환자를 우선했습니다. 의사 이길여만의 특징을 말씀해 주신다면?
“보증금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당시 환자 절반이 진료비 낼 돈이 없었습니다. 나머지 25%도 진료비의 절반밖에 내지 못했고요.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인데…. ‘수술 때문에 내일 굶고 오셔야 합니다’ 하면 ‘그러잖아도 굶는데요 뭐’ 그래요. 이분들이 일주일 입원해 나갈 땐 오히려 포동포동 살이 쪄 나가곤 했습니다. 보증금 안 받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죠.

환자를 진찰할 땐, 직접 안아 일으켜 부축해 화장실도 같이 다녀왔어요. 그럼 이 환자 상태가 어떤지 다 알 수 있지요. 안고, 부축해 다녀오는 동안 체온, 숨소리로 건강상태가 다 체크 되죠. 환자에게 청진기를 댈 때 차가운 금속 느낌에 놀랄까봐, 항상 가슴에 품고 따뜻하게 한 뒤 몸에 댔고요. 환자가 아프면 같이 고통을 느끼는 의사여야 해요. ‘아파 죽겠어요’ 하면 의사도 그렇게 느껴야 고칠 수 있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왜 아픈지 설명하는 데 그치는 의사가 돼서는 부족하지요. 산모 배 모양만 봐도 산달이 언제인지 알 수 있었어요. 환자에 미친 의사였죠.”

-현업 의사 생활을 하던 도중 돌연 미국 유학을 하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전쟁통에 의학 공부를 제대로 못 하다 보니, 늘 선진 의술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어요. 졸업 후 곧바로 가려 했는데 비행기 삯이 없었어요. 그래서 의사 생활을 해야 했고, 하다 보니 환자들에게 빠져 미국 유학 꿈은 멀어졌죠. 그러던 어느 날, 여기서 안주하면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더 이상 비행기 삯을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돈도 생겼구요(웃음). 1960년대 초로 기억하는데, 미국 의사 자격 시험제도가 새로 생겼어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환자를 돌볼 때인데, 시험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잠자는 시간을 줄여 거의 매일 밤을 새워가며 준비했어요. 그렇게 1년 준비해 시험 통과 후, 뉴욕의 병원 30여 곳에 지원서를 냈죠. 10곳에서 답변이 왔고, 그중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에서 항공권까지 보내주기로 해 그곳으로 결정을 했죠.”


“6·25 때 입대 남자 동기들 거의 살아서 못 돌아와
그 미안함,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환자에 미친 의사, 이제는 제자에 미친 교육자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처럼 새로운 일 도전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십시오”

-그때의 경험 중 인상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당시 미국을 가 본 한국인이 거의 없을 때여서 지금 들으면 우스갯소리 같은 얘기들이 많았어요. 비행기 화장실의 문이 잠겨서 못 나왔다더라, 샤워하는데 뭔가 잘못해서 소방차가 왔다더라 등등. 나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워커힐에서 친구들과 1박하며 미국 생활 예행연습도 했어요. 워커힐 호텔이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을 땐데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 에어컨, 샤워기, 문 작동법 등을 실전 연습하고 떠났습니다(웃음).

그렇게 도착한 미국은 천국 같았어요. ‘순설탕’ 사이다가 대한민국 최고의 귀족 상품일 때 이미 ‘슈가프리’를 팔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부자들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계란이 카페테리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문화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그런 곳에서 1년, 2년 살다 보니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져요. 의사로서 좋은 대우도 받았고요. 4년 됐을 때는 절대 돌아가지 말자는 생각도 했었지요. 유학 올 때 울며 약속했던 환자들만 아니었어도…. 그 아픈 분들, 나 아니면 죽을지도 모를 환자들을 생각하면서 귀국 결심을 하고, 한 달 만에 돌아왔어요. 돌이켜보면 그때의 이길여 마음이 너무 착하고,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창 젊을 때 좋은 것을 다 포기했으니까요.”

-지금의 ‘가천길재단’을 구상한 것은 언제였나요?
“75년도에 일본의 의료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고 온 뒤 그런 구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귀국 후 환자에 빠져 살다가 문득 ‘쿵’하는 울림이 왔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다 큰 바위에 부딪혔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내가 뭘 하고 있지? 나의 더 큰 꿈은 무엇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요. 그래서 일본으로 갔는데 미국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옆 나라가 이렇게까지 앞서 있는 현실에 정말 놀랐죠. 일본의 의료 수준, 의료 제도, 의료 보험 시스템을 보면서 배운 것이 많았고 우리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자극제가 됐습니다. 큰 그림을 구상하게 된 것도 그때였습니다. 선진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 거죠. 그런 고민의 산물이 지금의 ‘가천길재단’으로까지 이어져 온 것이죠.”

-스스로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라고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어린 시절 수수깡으로 바람개비를 많이 만들어 놀았어요. 바람을 맞으며 뛰어가면 바람개비가 막 돌아요. 바람이 없으면 산으로 있는 힘껏 뛰어 올라가면 돌고요. 제 인생이 바람개비처럼 역경이라는 바람을 뚫고 살아온 인생이었고, 힘차게 돌아가는 바람개비 보는 것을 즐겼던 것 같아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역경이 있었겠습니까. 바람을 뚫고 나가면 바람개비가 막 돌잖아요? 그게 신나는 일이었어요. 바람이 없으면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서라도 달려갔죠.”

-가천대 캠퍼스를 둘러보니 ‘바람개비 동산’이 있던데 그런 철학을 담은 것이겠죠?
“그렇죠. 제가 만들라고 지시한 적은 없는데 나의 철학이 학교 재학생들이나 관계자들에게도 스며든 결과인 것 같습니다(웃음).”

-총장님 삶의 키워드 3가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재단의 철학이자 이념이 곧 제 삶의 키워드입니다. ‘박애·봉사·애국’ 세 가지죠. 1958년 인천으로 올 때부터 의사는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환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슴에 새겼어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고3 때 남자 친구들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잃었어요.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였고, 동족끼리 싸웠고요. 부자 나라,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나라를 후세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죠. 하늘이 저에게 준 소명은 ‘많은 이들에게 넉넉히 나눠주고 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재단 승계와 운영은 어떻게 할지 궁금합니다.
“학교, 병원 모두 공익법인으로 돼 있어서, 사기업처럼 재산을 승계하는 문제가 없습니다. 리더십을 갖춘 분들이 이어가면 되고, 그동안 20, 30년 이사로 열심히 일해 온 분들이 많습니다. 제 철학을 더 단단하게 하고, 열정적으로 일해 줄 분들이 계속 나올 겁니다. 20년 전만 해도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단단하게 굳어졌어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좀 더 단단하게 뭉치게 하기 위해서지요.”

-마지막으로 젊은 후학들이 이길여를 통해 배웠으면 하는 것 하나를 꼽는다면?
“열정과 도전정신입니다. 삶의 의미는 도전하고 개척하고 이뤄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은 생각의 크기, 상상력과 비전을 의미합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라. 제가 늘 제자들에게 격려하는 말입니다.”



가천(嘉泉)…의술과 교육 내 삶의 나침판

가천길재단, 가천대학교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가천(嘉泉)은 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유학자 고 류승국 선생의 작명이다. ‘가회합례 수세인천(嘉會合禮 壽世仁泉)’의 맨 앞 글자 ‘嘉’와 끝 글자 ‘泉’을 따온 것이다. 풀이하자면 ‘기쁨이 모여 예(바른 삶)를 이루게 하고, 장수(건강)의 세상이 맑은 샘 같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가회합례’는 ‘기쁨’과 ‘예’라는 뜻을 담고 있어 ‘교육’으로 연결되고 ‘수세인천’은 ‘장수’의 뜻이 담겨 있어 ‘의술’로 연결된다. 의술과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 동문의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길여 동문은 본인 이름에 들어있는 길(吉)자를 좋아해서 길병원처럼 대학 이름도 길대학으로 지으려 했는데 가천의 뜻이 너무 좋아서 가천대학교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동문은 “정치권의 유혹도 있었지만 물리쳤고, 돈에 대한 유혹도 컸지만 모든 것을 개인 소유가 아닌 공익재단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의술과 교육만의 한 길을 걸어온 자부심이 느껴진다. 현재 준비 중인 회고록 부제도 ‘환자와 제자에 몰입해온 여의사의 기록’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가천’은 이길여 동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삶의 나침판이다. 바람개비 인생의 지향점인 셈이다.



이 동문 프로필

△1957년 모교 의대 졸업
△1968년 미국 Queen’s Hospital 레지던트 수료
△1977년 일본대학교 의학부 의학박사
△1995~2005년 서울의대 동창회장
△가천대 길병원 이사장
△가천대학교 총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경인일보 회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등급)
△인촌상(공공부문) 수상
△국제라이온스 인도주의상 수상
△뉴스위크 ‘2012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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