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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2021년 9월] 기고 에세이

모교 법인화 10년, 남은 과제

유홍림 모교 사회대학장·정치외교학부 교수


모교 법인화 10년, 남은 과제
 
유홍림
정치80-84
모교 사회대학장·정치외교학부 교수
 
꼭 10년 전인 2011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자율성 확보와 재정 확충을 위해 법인 체제로 전환했다. 그동안 새로운 비전 제시, 창의·융합 교육의 내실화, 산학협력 기반 구축, 사회 공헌과 국제화 활동 확대, 거버넌스와 조직 개편 등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여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거대한 시대적 변화와 위기 속에서 더 큰 틀의 과감한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 법인화의 취지를 살리는 길이다. 서울대는 한국의 고등교육 체계와 대학 생태계의 변화를 선도해야 할 책임이 동시에 있다.
근대 대학은 중세 대학의 신학부·법학부·의학부에 도전한 ‘학부들의 논쟁’과 과학의 의미를 둘러싼 ‘과학 전쟁’을 거치며 형성됐다. 전 세계적으로 대학 혁신의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는 지금이야말로 기존 학문 체계의 유용성을 따지는 논쟁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개인화된 맞춤형 교육과 개방적 학습 플랫폼 구축 등만이 혁신의 본류는 아니다. ‘미네르바 스쿨’의 켄 로스 디렉터가 말하듯 대학교육의 목적이 ‘직업인 양성이 아니라 지혜를 키우는 교육 방식으로 더 나은 사상가(thinker)를 만드는 것’이라면, 학생이 경험해야 하는 대학은 치열한 토론으로 생각과 공감의 폭을 확장하는 곳이어야 한다.

마지막 남은 공론장인 대학은 경합의 장이어야 한다. 유행하는 사례를 모방하는 생존 전략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예컨대 기존의 칸막이 학제를 유지한 채 시도되는 학제 간 융합교육과 협업연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1세기에도 교육과 연구가 기존의 학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면, 그 정당성이 학문 간 논쟁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한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 등의 과학기술 담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대학은 산학협력을 확대해 활로를 개척하고, 그에 맞춰 교육 방식과 내용을 개편하려 한다. 한편으론 일리 있고 유용한 노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대학 고유의 정체성을 다시 묻고, 현실적 요구와 압력을 용기 있게 해부하는 일도 서울대에 맡겨진 책무다.

21세기형 ‘학부들의 논쟁’을 감행해야 한다. 이성과 욕망이 서로 각축하며 자아를 지배하려 하듯, 모든 학문 영역은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지배를 추구한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가장 포괄적이고 규범적인 질문은 더는 철학 고유의 질문이 아니고, 과학기술에 의해 답이 제공되기도 한다. 대학 혁신의 기저에는 세계관을 둘러싼 경쟁이 존재한다. 무엇이 중요한 질문이며, 그 질문에 접근하는 적절한 방법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결국 미래대학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물론 중요한 질문들이 하나로 묶이기 어렵기 때문에 현실적인 모습은 광역의 학문 분야별로 분권화된 네트워크 형태다.

서울대는 기존 학제를 개편하고, 학문 분야별 국내외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학문 분야별 네트워크가 한국의 대학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반이다. 서울대가 새로운 위상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높은 성곽의 아성을 더 공고하게 다지기보다 자율 단위별로 밖으로 나가 경쟁하고 협력해야 한다. ‘학부들의 논쟁’을 거쳐 재편된 학문 분야별 자율 단위들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형성하고 공존하는 생태계가 혁신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미래 서울대의 모습이다.

이러한 혁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다양성과 개별 분야의 독자적 발전을 장려하면서도 서울대 전체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내부의 중심, 학부 대학을 구축해야 한다. 내부의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규제와 관행적 타성을 스스로 벗고 유연하게 교육과 연구의 활력을 살리려는 노력도 절실하다.

*중앙일보 8월 9일자에 게재된 칼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