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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2021년 7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48년간 1만5000명 무료 진료 “의사로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죠”

LG의인상 수상 고영초 건국대병원 자문 교수 인터뷰
48년간 1만5000명 무료 진료 “의사로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죠”

LG의인상 수상
고영초 건국대병원 자문 교수



“1973년 여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으로 생애 첫 의료 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농촌이 무의촌이었고,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병원 문턱이 높았죠. 아파도 의사 만나기 힘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료 진료를, 그것도 서울대병원 의사한테 받으니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만면에 띠던 그 웃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의사로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죠.”

그 후로 4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꾸준히 의료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고영초(의학71-77)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자문 교수. 2005년 건국대 의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학장 재임 시절 사회의학의 한 분야로서 의료 봉사를 주제로 한 강좌를 개설했다. ‘의사로서 누리는 기쁨’을 널리 전하고자 한 것. “제자 중에 한두 명이라도 날 닮은 의사가 나온다면 이 또한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6월 28일 서울 광진구 소재 연구실에서 고영초 동문을 인터뷰했다.

“꾸준히 운동하던 사람이 며칠씩 쉬면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처럼, 이제는 봉사를 안 하면 몸이 이상해져요. 의료 봉사를 하면서 되레 제가 치유되는 기분이 들 때도 많죠. 1975년 금천구 시흥동에 설립된 ‘전진상의원’은 산동네 의료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1987년 개원 후 영등포 쪽방촌으로 옮긴 ‘요셉의원’은 행려병자와 알코올 중독자를 돌봐줍니다. 1997년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에서 시작해 지금은 서울 성북동에 정착한 ‘라파엘 클리닉’은 국내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진료 환경을 개선하고자 출범했고요. 이 세 곳을 한 달에 서너 번씩 가서 진료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일 하려고 모인 곳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날엔 몇 시간씩 힘들게 수술하고 1시간 넘게 운전해서 파김치가 되어 도착하기도 해요. 그러나 맛있는 저녁 같이 먹으면서 재치 있는 농담과 옛 추억 이야기 나누다 보면, 씻은 듯 피로가 풀립니다. 즐겁게 진료하고 개운해져서 집으로 돌아가죠.”

이들 의료기관의 또 다른 공통점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가톨릭 단체가 설립했다는 점이다. 전진상의원의 ‘전진상’은 온전한(全) 자아 봉헌, 참다운(眞) 사랑, 끊임없는(常) 기쁨이란 뜻으로 ‘국제가톨릭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의 영성에서 따 온 이름이다. 요셉의원의 ‘요셉’은 가톨릭대 출신 의사이자 ‘예수의 작은 형제회’ 회원인 설립자 고 선우경식 원장의 세례명에서 유래했고, 라파엘 클리닉은 모교 의과대학 가톨릭교수회와 가톨릭학생회가 힘을 합쳐 설립했다.

고영초 동문 또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성당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란 고 동문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 자신도 막연히 신부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고. 실제로 그는 가톨릭신학대 부설 학교에서 5년 동안 사제 양성 교육을 받았다. 반듯하게 빗어넘긴 은발, 선량한 눈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반짝이는 눈빛과 온화한 웃음. 그러고 보니 로만 칼라를 목에 두르고 있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은 데는 4·19혁명 때의 경험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사제 양성 학교 5년 다니다가
대입 준비 1년만에 모교 합격

가톨릭계 자선병원 의료 봉사
소외층 외국인노동자 등 돌봐

“초등학교 2학년 땐데, 난생처음 보는 난리에 겁도 없이 구경을 다녔어요. 말 탄 경찰들이 곤봉으로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학생들은 소방차를 탈취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어디서 콩 볶는 소리가 막 나고 그랬는데, 당시엔 그게 총소리였는지도 몰랐죠. 인파에 휩쓸려 제기동에서 용산 삼각지까지 내려갔어요. 오후 5시 계엄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더군요. 쥐 죽은 듯 조용한 도시의 복판에 혼자 남게 돼서야 덜컥 겁이 났습니다. 무서워서 울고만 있었죠. 그때 급히 귀가하던 청년 한 명이 저를 자기 하숙집에 데려가 하룻밤 보살펴줬어요. 씻겨주고, 먹여주고, 숙제하는 것도 봐주고, 새 노트와 연필도 하나씩 주고…. 수호천사를 만난 기분이었죠. 긴 시간 의료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데는 그때 입은 은혜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작은 선의도 궁지에 몰린 이에겐 크고 고마운 것이라는 걸 절감했으니까요.”

다음 날 아침 일찍 고 동문을 집에 데려다준 그 청년은 식사 대접도 마다하고 홀연 떠났다. 늦은 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기 위해 인근 병원 영안실까지 뒤졌다는 고 동문의 부모님. 어떻게든 사례하고 싶어 받았던 메모엔 ‘서울의대 본과 4학년 아무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 수소문했을 땐 ‘그런 사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메모에 오기가 있었는지, 은인이 자신을 숨기고 싶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도와 살아난 목숨, 하느님을 섬기는 데 온전히 써야겠다는 다짐만큼은 확고했다. 1969년 예비고사가 시행되면서 고 동문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고교 선배 중 상당수가 예비고사에서 떨어져 신학대학 진학에 좌절을 겪었던 것.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합격·불합격만 가리는,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은 다 붙는 시험에서 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떨어지는지 납득할 수 없었어요. 대체 뭘 배우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승부욕도 생겨서 고3 진학 무렵 일반고로 편입했습니다. 미분, 적분 같은 건 하나도 모른 채 고3이 됐죠. 학우들은 선행학습으로 이미 고3 과정을 끝낸 상황이었고요. 5년 동안 사제 교육을 받으면서 익힌 라틴어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어, 독일어만큼은 시작부터 최우등이었죠. 기숙 학교였던 까닭에 운동할 시간도 많았고요. 덕분에 체력이 받쳐줬고, 열심히 공부해서 입시 준비 1년 만에 모교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신부가 영혼을 치유하는 성직이라면 의사는 육신을 치유하는 전문직. 고 동문은 다른 진로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4·19 때의 다짐을 떠올리며 의사 겸 신부가 되려 했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품었던 사제의 길을 내려놓게 된 건 본과 4학년 때 부친이 당한 뺑소니 교통사고 때문. 혼수상태로 9개월 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 자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본래 내과를 선호했고 역량도 남달랐지만, 신경외과를 선택하게 된 것도 부친의 사고 때문이었다. 당시 신경외과는 수술을 잘해도 결과가 나쁘기 일쑤여서 치료실적을 올리는 것은 물론 보람을 느끼기도 힘든 진료과목이었다. 고 동문은 그러나 낙후된 만큼 발전 가능성이 클 거라 생각했고, 부친 같은 환자를 치료하라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요셉의원에 있을 때였어요. 50대 남성 환자가 다리를 절룩이며 찾아왔는데, 온몸에서 악취가 말도 못 하고 바지는 똥오줌으로 뒤덮여 있었죠. 허리통증과 다리 불편을 호소하길래 ‘디스크겠거니’ 하고 얼른 약을 처방해줬습니다. 솔직히 빨리 내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2주 후 다시 보니 병세가 더 나빠진 거예요. 문득 마태복음 25장 말씀이 뇌리에 박히더군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손도 대기 싫었던 환자의 바지를 벗겨 살펴보니 척수 종양이 의심되더군요. 신속히 MRI를 찍고 수술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론 환자 한 명 한 명 옷을 벗겨 검사하고, 세심하게 돌봤다는 고영초 동문. 신기하게도 그때부턴 냄새도 안 나고 환자들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환자를 예수 대하듯 하게 됐다고.

“봉사는 주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론 받는 거예요. 환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줬을 때 밀려오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저는 의사이기 때문에 다른 직종에 비해 봉사하기가 쉽지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남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서울대 동문이면 우리 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을 겁니다. 더 받은 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나경태 기자


고영초 동문이 전진상의원에서 수십년간 무료 진료하고 있는 황소영씨(왼쪽). 두 사람은 동갑이지만, 황씨는 고 동문이 아버지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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