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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2021년 4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울주 반구대를 찾아서

김운하 소설가 에세이

울주 반구대를 찾아서

김운하(본명 김창식)
신문84-88 소설가




코로나가 잠시 잦아들던 작년 여름, 미루던 답사 여행에 홀로 나섰다. 허먼 멜빌을 모티브로 책을 구상하고 있었고, 고래와 관련된 몇몇 장소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과 이젠 유물처럼 남아있는 과거 포경업의 인상적인 흔적들을 돌아보았다. 수천년 전, 신석기 시대 고래를 사냥하던 선사인들이 남긴 반구대 암각화와 그 주변도. 천전리 암각화도 잊을 수 없다. 청동기 시대부터 새겨진 신비로운 각종 문양들과 6세기 초 신라 왕족들이 새겨놓은 애틋한 사연의 문장들이 주는 경이로움이란.

진정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던 충격은 그러나, 따로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라 더 충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전리 암각화 아래로 작은 냇물 바로 건너편 너른 바위들에 공룡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6,500만년 전에 멸종한 공룡들. 까마득한 옛날, 인간은커녕 포유류 조상조차 오늘날 쥐와 비슷한 작고 야행성 동물에 불과하던 그 시대에, 지구를 주름잡던 그 공룡들이 남긴 무수한 발자국이 인간들의 역사가 새겨진 바위을 무시로 활보하고 있었다니!

공룡들이 밟고 다녔던 진흙땅은 영겁 세월을 거치며 이젠 딱딱한 바위로 변해 있었다. 순간,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탄식 같은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맨발로 조심스레 움푹 패인 모양의 공룡발자국 위에 발을 디디고 섰다. 마치 그러면 훌쩍 시간을 뛰어넘어 공룡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기라도 하는 양.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그만 맥없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거기서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를 작디작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탓에.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알고 보니 반구대 주변 계곡 여기저기에 공룡 발자국이 있었다. 그 계곡에서 좁은 숲길을 따라 돌아가는 길 내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해 간 생명들과 인간 역사를 반추해 볼 수밖에 없었다. 반구대 주변엔 인간의 역사도 깊게 남아있었다. 신라, 고려, 조선 시대 유적들. 고려시대 정몽주가 근방에 유배를 왔다간 흔적, 반구대 근처 조선시대 선비들이 세운 정자와 반구서원.

그 장소들은 무려 1억년 세월의 깊이와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례없는 장소였고, 그 압도적인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경험은 나의 하찮은 언어로는 감히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있는 지경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인간 이전의 세계, 공룡들과 이후 고래들이 울산 주변 바다에서 노닐던 세계와 인간 이후, 특히 지난 1만년 이래 농경이 시작되고, 국가가 성립하고, 전쟁과 계급 투쟁과 전쟁과 착취가 횡행해온 세계를 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왠지 인간의 역사 전체가 가소로워 보였다. 이 작고 영악한 포유동물들이 남긴 잔혹한 투쟁의 역사는 저 거대한 자연의 역사속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러워졌다. 이들 스스로 자부하는 모든 영광과 업적, 위대한 역사 따위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반구대를 떠나 다시 돌아간 인간의 도시, 첨단 공업도시 울산에 들어선 빌딩들과 대규모 공장들, 무리 지어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저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고요한, 침묵하는 자연계, 떠들썩하고, 휘황하고, 매연 가득한 인간의 도시. 바위에 고래 그림을 새겨넣던 선사인의 눈으로 이 21세기의 도시를 바라보려 애써 보았지만, 나로선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김 동문은 소설가이자 비평가, 인문학자로 소설 ‘137개의 미로카드’, ‘자살 금지법’, 인문서 ‘카프카의 서재’,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등의 책을 쓰고 강연 활동을 해왔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