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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021년 3월] 기고 에세이

그 얼굴에 그 이름

동문 기고

그 얼굴에 그 이름

임효빈
화학공학61-65
넷스퍼 상임고문


어느 나라든지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대체로 그 나라에 가장 빼어난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거나 국가적인 자부심을 상징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고액권 아닌 1달러짜리 최소 단위 미국 지폐와 유통량이 가장 큰 25센트 동전에 새겨진 조지 워싱턴이야말로 바로 가장 절묘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넘어 명실공히 나라의 자존심이며 양심이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싸웠고, 신생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공명을 던졌다. 그의 인생역정을 캐다 보면 크고 작은 개인적 흠결이야 왜 없겠는가? 그러나, 4 반 밀레니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애국 민초들의 영웅이며, 정치인들을 비롯한 국가지도자들의 롤모델이다.

미국의 각종 액면 지폐나 주화에 보이는 인물은 종종 바뀌기도 하지만, 토마스 제퍼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같이 걸출한 대통령뿐만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개국공신이나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국가혁신 정책 입안자들의 얼굴 수십명이 그 나라 250년밖에 안되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여담이지만, 그 중에는 뉴 밀레니엄 2000년에 미국화폐 발행 사상 최초로 1달러짜리 주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얼굴, 사카가위아(Sacagawea)라는 무명(?)의 원주민 여성이 있다. 출생 내력도, 사망연도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아이다호주 쇼쇼니(Shoshone)족 태생으로만 알려진 그녀,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미국 건국 초기 제퍼슨 대통령의 지시로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클라크(William Clark)가 3년간에 걸쳐 감행했던 야심찬 서부개척의 대국가프로젝트는 그녀가 동행하면서 헌신적으로 도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역으로, 가이드로, 생활 도우미로 그녀가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에 혼신으로 이바지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로를 기려 미국여성권리협회는 이미 100년 전에 그녀를 국가 모범여성상으로 추대했고, 전국에 걸쳐 수십 군데에 크고 작은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2001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그녀를 미정규 육군 명예상사로 추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돈을 들여다 보자. 100원짜리 동전의 이순신. 1,000원권 퇴계 이황, 5,000원권 율곡 이이, 1만원권 세종대왕, 그리고 5만원권 신사임당, 거기에 1962년 통화개혁 때까지 유일하게 올라있던 이승만 대통령까지 합쳐서 이렇게 고작 여섯 분이 우리 돈에 등장하는 인물의 전부다.

이들은 모두 민족의 스승이요 구국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외에는 지금 나이로 치면 500세에서 600세 안팎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스스로 얼마나 소홀히 하기에, 지난 500년의 우리 역사의 위인, 인물들은 다 어디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 격랑의 지난 100년 동안만 해도 이 나라를 지켜내고 다시 일으킨 인물들,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조차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대할 수 없이 사라졌단 말인가?

20세기 들어와 망국의 현실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족의 위기에 몸을 던졌던 우리 선열들. 항일 독립, 건국, 내전, 민주화, 군정 그리고 다시 민주화로 이어지는 건국, 부국, 통일운동에 바쳐진 이름, 이름들. 앞으로 다시 100년 후, 200년 후 화폐에 새겨 우리 후손에게까지 물려 줄만한 자랑스러운 얼굴들-선각자, 애국자, 체육인, 예술인, 사회사업가, 학자들의 이름은 우리가 성심껏 찾아 기리기에 달려 있지 아니한가?

오늘날에도 의미 없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이름들, 얼굴들, 그 가운데 우리 역사를 빛낼, 이름에 걸맞는 얼굴, 얼굴에 걸맞은 이름의 주인공을 찾을 길은 없는 것인가? 초대 대통령 얼굴 하나 화폐에 새겨넣지 못하는 지지리 못난, 아니 비겁한 백성의 이미지를 우리는 언제나 벗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