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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020년 4월] 문화 신간안내

“책 출간 하고픈 아버지 소원 뒤늦게 들어 드렸어요”

정찬조 동문 쓰고 아들 정인섭 교수가 엮은 다시 찾은 조춘


다시 찾은 조춘


화제의 책

“책 출간 하고픈 아버지 소원 뒤늦게 들어 드렸어요” 

정찬조 동문 쓰고 아들 정인섭 교수가 엮은 
다시 찾은 조춘(早春)


1950~60년대 학번 중 ‘수업료’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동문이 있을까. 1940년 개봉된 영화 ‘수업료(감독 최인규)’는 해방 이전 제작된 한국 최초 아동 주역 영화다. 부모가 행상을 떠난 뒤 병든 할머니와 사는 소년이 수업료를 내지 못해 겪는 고생담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상영될 만큼 크게 성공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해방 이전 제작 영화 필름이 15개 남아 있는데 그 중 이 필름이 있다) 당시 주인공 소년역을 맡은 배우가 정찬조(독문53졸) 동문이다. 

정찬조 동문의 아들 정인섭(법학73-77 대학원동창회장·사진) 모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부친의 시 모음집 ‘다시 찾은 조춘’ 서문에 위 내용이 간략히 소개돼 있다. 한국 영화사에 작지만 소중한 연결고리다.

지난 3월 25일 서울 잠실 한 카페에서 만난 정인섭 교수는 “아역배우로 활동하셨던 그때가 선친의 인생 중 세속적 절정기였는지 모르겠다”며 “그 이후 영화 출연은 없었다”고 전했다. 

아역배우로 영화 ‘수선화’에도 출연했던 정찬조 동문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혈혈단신 고아로 피난을 떠나 모교 부산 가교사에서 독문과 2호생으로 졸업했다. 문학청년을 자청하며 많은 시를 썼고, 1학년 시절 ‘새벽 종소리’라는 육필 자작시집을 만들었다. 1960년 ‘조춘’이란 제목의 시집을 펴내고 한국독일문학회 창립 초기 주역으로 활동했다. 한국독일문학회가 국내 최초로 독일 명시의 직역을 목적으로 출간한 ‘별이 부르는 노래(청우출판사, 1960)’의 역자 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26살 결혼 이후 시에 대한 향수만 지닌 채 경제적으로 평탄치 못한 범부의 삶을 살다 생을 마쳤다. 정인섭 동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혹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냐’고 여쭈니 ‘그간 써온 글을 모아 책을 내보고 싶다’고 하셨다”며 “그 소원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들어 드렸다”고 했다.

“아버지 세대의 특징은 정리정돈을 잘하고 한번 손에 들어온 물건을 오래 보관한다는 것이지요. 여러 번의 이사 과정 중 잃어버린 물건도 많았지만 적지 않은 유품이 남았습니다. 6·25 전의 시작 노트, 광고지 뒷면에 쓴 시, 부산 피난 시절의 편지, 메모지에 써 놓은 수필 등 상당 부분의 자료를 보관해 두셨더군요. 선친 글의 대표는 시라고 생각해 시집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찾은 조춘’에는 총 81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 대부분은 정찬조 동문이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완성한 작품들이다. 대학 시절 쓴 ‘꽃이 피었도다-독문과 신입생 환영식에서’는 1952년 대학신문 6월 2일자에 게재됐다. 시집 마지막 장인 ‘신년 원단편’도 인상적이다. 연말연시에 지인들에게 보낸 시 형식의 신년 인사말인데, 그 해 띠 동물의 특징을 살려 재미있는 글을 보냈다. 이런 식이다. ‘각죽 각죽 어디나 일터고/ 각죽 각죽 밤새워 오간다/ 각죽 각죽 양식을 모으고/ 각죽 각죽 새끼를 기른다/ 각죽 각죽 내 동네 타 동네/ 각죽 각죽 어디고 일한다’ (쥐띠 해인 1984년 갑자년에 보낸 연하장 시)  

정인섭 동문은 “많은 사람이 부모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원하지만,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면서 “후배들을 만나면 부모 삶에 대해 녹취를 하라고 권한다. 대한민국 격동기를 살아오신 그 분들의 삶은 모든 게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정인섭 동문은 부친의 시 모음집 외에 조모 김복진 여사의 생애를 조명한 ‘김복진, 기억의 복각(경인문화사)’이란 책도 냈다. 김복진 여사는 1930년대 조선 제1의 여자 연극배우, 아동문학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