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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020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이어령 문학평론가·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인터뷰

취직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동문을 찾아서

취직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이어령 (국문52-56) 문학평론가·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새해 벽두를 열어줄 동문으로 이어령(국문52-56) 선생을 찾았다. 1월 6일 서울 평창동 ‘평창동의 봄’ 식당에서 진행된 인터뷰에는 신수정 회장이 동석했다. 신 회장이 암투병 중인 이어령 동문과의 다리를 놨다. 이 동문과 신 회장은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동문이 문화관광부 장관 재직 시 만든 ‘사모곡상’의 첫 수상자가 신수정 회장의 모친이다. ‘사모곡상’은 예술교육의 참뜻을 알리기 위해서 제정된 상이다. 이 동문은 “신수정 교수가 총동창회장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동명이인인줄 알았다”며 “왜냐하면 동창회장은 나보다도 연세가 높으신 분이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보다 젊고 여성 동문이 동창회를 맡게 된 데 참신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령 동문은 2시간에 걸쳐 문리대의 자유로운 학문 정신과 이 시대 젊은이들을 향한 조언을 쏟아냈다. 




-동창회와 인연이 있으세요?
“임광수 회장 재임 시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여하게 됐지. 그래서 동창회관을 새로 지을 때 현장에도 가보고 이런저런 조언도 했어. 1, 2, 3, 4층 외부 유리창에 각각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물을 흘러내려서 폭포수 같은 장면을 연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 이뤄지지는 않았어.”

-지금이라도 설치하면 근사하겠네요.
“4층에만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전체에 물이 흐르게 만드는 거라 생각하고 어렵다고 했던 것 같아. 네 개 층에 각각 설치해 물을 내리면 연속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원격 조정으로 노즐을 조정하는 시스템으로 가동하면 되고. 이따금 주말이나 행사 때 특히 동창회에 이벤트가 있을 때 조명까지 해주면 월하(月下) 스크린이 되는 거지. 서울 도심 한복판 건물에서 안개 폭포수가 쏟아진다? 얼마나 장관이겠어. 그런 건물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거야. 유리 청소도 되고, 한여름엔 습도나 기온 조절도 해줄 수 있지.” 
      
-또 다른 조언도 해주셨나요?
“동창회관 건립 기금을 모으기 시작할 때 독려 스피치를 해준 적도 있어. 사실 나는 동창의식이 강한 사람이 아니야. 임광수 회장이 열심히 하니까 도와준 정도지.”

이 대목에서 이 동문은 미국 버클리대학에 다니던 손자를 보러 갔다가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손주가 선물한 버클리대학 티셔츠를 입고 한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더라고. 알고 보니 내가 입은 티셔츠 때문에 동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대학을 지적인 고향이라 생각하고, 처음 보는 사람도 이렇게 반가워 하는구나’ 싶었지. 만약 내가 서울대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반갑다고 인사할 동문이 있을까. 아마 본 체도 안 하겠지.”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수상하신 적도 있죠?
“10회 때 김재순 의장, 권이혁 총장 등 올드 보이와 함께 받았지. 그때 이런 수상 소감을 밝혔어. ‘이 상을 받고 보니 처음으로 내가 서울대를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문리대 다닐 때도 서울대 교표가 있는 베레모를 쓰지 않았다. 다만 파란색 문리대 배지는 가끔 달고 다녔다. 그만큼 자기가 다니는 단과대학 또는 학과에만 정체성이 있었지, 서울대학이라고 하면 잘 체감할 수 없었다. 당시 교내 사진사가 있었는데, 이 분이 연, 고대에 가서도 사진을 찍었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 연대나 고대를 가면 20, 30명씩 모여서 단체사진을 많이 찍는데, 너희들은 싹수가 없어서 각자 내 등을 쿡쿡 찌르면서 나 좀 찍어줘요 한다고. 고향 집에 보낼 증명사진 용도 정도로. 아무리 많아 봐야 두세 명이고 여럿이 모여 사진 찍는 법이 없다고. 전부 개인주의자라 그렇다나. 나 역시 연고주의 따위 무시하고 살았는데, 살다 보니 단체사진 찍는 법도 배워야겠다 싶더라. 오늘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는다.’”


문리대 정신 다시 되살리고
지적 허영, 호기심 넘쳐나야
그래야 미친 사람이 나오지

제10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동창회관 폭포수 설치 제안
그런 장관 어디도 없을 텐데


-피란 시절 문리대에 다니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몇 학번이시죠?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단기를 사용해서 뒷번호가 85야. 85학번이라고 했지. 전시 중이라 부산 대신동 가교사에서 공부를 했어. 그때는 전시학생증을 갖고 다녔고 입시도 세 곳인가, 네 곳인가 나뉘어서 시험을 치고 들어왔지. 나는 대전에서 시험을 봤지.”

-전쟁통에 입시를 치르고 들어간 대학 생활이 어땠을지 잘 상상이 안 가요.
“지금처럼 한곳에 모여, 좋은 건물에서 공부를 했다면 별로 기억나는 일이 없을 거야. 그때 우리는 판자촌에 지어진 가건물에서 흙바닥에 제대로 된 책상도, 의자도 없이 공부했지. 여럿이 함께 앉아 공부하던 긴 책상에 학생들이 낙서를 많이 했어. 수학과 학생은 수학 공식, 영문과 학생은 영시 구절을 적는 식이었지. 불투명한 비닐 재질 창에는 펜으로 뽕뽕 구멍을 내 낙서도 했고. 지적인 낙서가 많았어. 그야말로 문과, 이과가 하나로 융합된 리버럴 아트 앤 사이언스(Liberal art & Science)를 제대로 한 거야. 

교수들도 군복을 입고 강의했는데 전시다 보니까 휴강이 잦았어. 그래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 도서관에 책이 많았어. 사람도 오기 힘든 피난 오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갖고 왔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놀라워. 다 쓰러져가는 하꼬방(판잣집) 같은 건물에 수 만권의 책이 있었어. 전시 피난 통의 독서가 유별난 맛이 있었지. ” 

-피난 시절 대학에 도서관까지 있었다니 놀랍네요.
“대신동 언덕 위에 본부 건물, 문리대, 도서관이 있었지. 밖은 전쟁통인데 도서관만 들어가면 딴 세상이야. 그리스부터 남태평양 이야기까지. 흙냄새도 나고. 자주 가다 보니 사서랑 친하게 되고 좋은 책을 빌려 자취방에서 읽기도 했지.” 

-문리대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유가 뭘까요.
“지금처럼 인문대와 이과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서 전공이 다른 학우와 벽을 넘어 서로 어울리면 지적 대화가 가능했던 거야. 대학은 교수나 학교 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냐. 도서관에 가면 배울 내용은 다 있어. 같은 또래에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들어온 학생들끼리 형성한 지적 커뮤니티가 의미 있지. 문리대의 보헤미안들,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하며 다른 세상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경이로움이 있었어. 지적 목마름이 가장 강했던 때지. 내 상상력의 원천은 바로 그때의 문리대야. 문리대는 학기 초에 전 과목 시간표를 쫙 붙여. 개미들이 사탕에 모여들듯이 학생들이 이 지적 세계로 몰려. 교과 과목부터가 낯설고 새로워서 지적인 군침이 나지. 그중에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는 거야. 전공 부전공 그리고 선택과목의 학점 수만 따면 되는 거니까. 팔세아어 연구니 위상기하학 같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강좌를 섭렵했어. 거기에서 생물학과 김정현(생물52-56 전 워싱턴DC동창회장, 작고) 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지. 그때 소련 생물학자 루이센코의 이론도 듣고 토론도 했어. 지금 내가 컴퓨터를 하고 인공지능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그 덕이지.”

-문리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모교에 자유전공학부가 설립됐어요.
“학과, 학부 단위로는 큰 의미가 없어. 학교 전체가 자유 전공이어야 하지. 리버럴 아트 앤 사이언스말이야. 음대, 미대, 공대 과목을 모두 수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해야 창조력이 키워지는 거고. 셰익스피어 몰라야 이과생이고, 수학 못 하는 것이 문과생의 자랑이 되면 안 돼.”

-외국의 명문 대학들은 문리대처럼 운영되고 있죠.
“서양의 학문은 희랍 전통을 이어받아서 문과, 이과가 나뉘어져 있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 등 과거 학자들 보면 모든 분야를 아울렀잖아. 원래 자연철학자라고 했었는데 1833년 히얼이란 사람이 과학자(scientist)란 단어를 만들었어. 이스트(-ist)는 쟁이를 뜻하는 말이야. 음악 하는 사람은 뮤지션이어야 하지, 피아니스트, 바이올리스트로 머물면 안 돼. 마찬가지로 사이언티스트가 되면 안 돼. 19세기 말에 토마스 헉슬리가 사이언티스트란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해. ‘또 미국 녀석들이 이상한 영어를 만들었나 보군. 나는 내추럴 필로소퍼지 사이언티스트가 아니다.’ 그런데 이후 전문화 시대가 되면서 자연철학자는 자연과학자가 되어 버린 거지. 요즘 융합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전문화됐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나온 거야. 과거에는 다 융합 학문이었는데 말이야. 우리나라도 문리대 같은 것 하나 있으면 좋겠어.”  


대담 : 신예리(영문87-91) JTBC 보도제작국장·본지 논설위원 



-대학이 위기라고 하는데 문리대가 답이 될 수 있을까요.
“문리대를 복원하고, 굶어 죽을 것을 각오한 젊은이들이 오도록 해야지. 그래야 한 사람이 몇만 명의 새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지. 있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할 새로운 일터를 만드는 꿈.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생각 못 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를 양성하는 거지. 그러려면 지적 허영과 지적, 창조적 상상력에 목숨 거는 집착이 있어야 해. 미친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시인 폴 발레리는 시가 안 써지면 수학 문제를 풀었어. 첫 논문 주제가 건축이었고. 벤야민이 ‘수학자, 건축가, 향해사의 꿈을 다 이룬 사람’으로 부러워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

-서울 수복 후 동숭동 캠퍼스로 돌아와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도서관과 음악감상실에서 살았지. 촌놈들은 대개 도서관 가고 도시놈들은 음악감상실로 갔지. 전시에 가장 빛났던 게 음악이야. 황량하고 희망도 없는 그 시대를 살게 해준 힘이지.” 

-주로 가던 음악감상실이 어디였나요?
“돌체, 르네상스, 청조를 자주 갔어. 그때 DJ에게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틀어 달라고 하면 촌놈이야. 작품 넘버, 악단, 지휘자 이름까지 적어서 내야 대접받을 수 있었어. 나는 그런 면에서 촌놈이었지. 책에 대해서는 꿀릴 게 없었는데 음악은 그랬어. 배가 고플 때라 다방 가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종업원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설탕을 듬뿍 넣고 비비는 거야. 놓고 간 카네이션(연유 브랜드)까지 붓고 커피로 허기를 달래는 거지. 당시 음악다방은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어. 술 마시고 꼭 들르는 곳이었는데, 대학생, 문인들이 술주정하면 마담도 봐주고 깡패도 봐주고 그랬어. 명동 한복판에서 큰소리치는 무리는 깡패와 문인들밖에 없었어. 그런 낭만이 있었지.”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교수님은요?
“데카르트를 연구한 박홍규 교수는 중급 불어를 가르쳤어. 호남분이라서 전라도식 불어가 튀어 나와.(웃음) 경상도 분인 손우성 교수는 경상도 사투리의 불어로 오히려 본토 발음하는 교수들보다 깊이가 있었어. 하지만 자칭 국보라고 하는 양주동 선생 같은 분은 시간강사로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이나 그것만 연구하느라고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어. 두보시 해석을 놓고 외통수 질문하면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용타 용타 성대(경성제대의 약칭) 학생이라 다르다’고 했지.(웃음)”

-사모님(강인숙 국문52-56)과 대학 동기이신데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캠퍼스 커플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연애해서 결혼한 것은 졸업 이후였어. 학교에서는 그냥 친구였고. 내가 대학 4학년 때 경북 문경으로 가서 영어 선생을 했어. 국어 선생으로 갔는데, 당시에 국어는 한약방 선생도 가르치고 아무나 하는 거야. 영어는 아무나 못 가르치니까 내가 하게 됐어. 영어뿐 아니라 한문, 화학도 가르쳤지. 아내도 그때 고등학교 교사였어. 그때 본격적으로 연애를 해서 결혼한 거지. 

사실 젊었을 때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 스스로 시인 이상보다 우월한 천재라 생각해서 더 빨리 죽을 거라고 믿었지.(웃음) 결혼을 해서 가족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 전쟁 이후 우리나라 상황이 사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오늘만, 오늘만 아름다워’ 그런 생각으로 살 때야. 그렇게 결혼 안 하고 살았다면 희대의 역작을 낼 수 있었을텐데, 아쉽기도 해.(웃음) 

결혼 후 단칸방에서 살 때 연탄 가는 담당이었어. 그런데 글 쓰느라고 연탄 가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방이 냉골이 된 거야. 첫 원고료를 받아 금붕어 세 마리를 사다 놨었는데 어항 물이 얼면서 금붕어들도 다 얼어버렸지.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가 곤로에 물을 끓여서 살살 부어 주니까 금붕어 꼬리가 꿈틀거리더라고. 그때 내가 비로소 아버지와 남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 ‘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내가 선택해서 낳은 아이들을 추위에 떨게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라고 말야. 그전까지 정말 자유분방했지. 돈이 없더라도 양담배 필립모리스만 사서 피웠으니까. 필립모리스를 너무 좋아해서 문리대학보 표지도 필립모리스를 모방할 정도였어.”


-문리대학보 만들던 이야기도 좀 더 들려주세요.
“3학년 때 학예부장을 맡아 문리대학보를 만들었지.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완역해 수록하고, 아서 조셉 맥타가트 같은 외국 교수의 영문 논문을 원문으로 게재하기도 하면서 객기를 부렸어. 당시 젊음의 모든 것을 바치는 청춘의 번제 같은 게 문리대학보야. 배의 닻이었지. 풍랑 있는 바다에 잠시 머물게 하는 닻. 그때 갖게 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만든 게 ‘세계전후문제작품집(전10권 신구문화사)’이었고. 당시 세계 소설은 일본어판을 번역한 게 대부분이었는데, 세계전후문제작품집은 내가 직접 문리대 학맥을 이용하여 직접 번역한 작품집이었어. 내가 주간한 문학과 사상도 마찬가지인데 ‘백년 동안의 고독’, ‘희랍인 조르바’, ‘어둠의 거리’는 일본에서 소개되기 전 우리 독자에게 먼저 알려준 작품들이었어. ‘우리의 주체성으로 외국문학을 제3국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편찬한 최초의 책’이라고 평한 박사 논문까지 나왔지. 당시 문리대에는 어학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 외국어 시 낭독회도 하고. 그런 지적 호기심이 아카데미즘과 통했던 거야.”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에 올인하는 분위기죠. 학점 안 나오면 교수에게 따지기도 하고.
“우리는 아예 취직할 곳이 없다 보니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웃음)”

-후배 재학생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문리대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지금의 서울대에도 살아 있다고 봐. 사막에 대하가 흘렀던 흔적이 남아 있듯이. 아무리 실용적인 학과라 할지라도 리버럴한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해.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라도 리버럴 아트와 리버럴 사이언스를 마음껏 하는 특권을 누려야지. 그때부터 취직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나는 대학에서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어. 싱킹맨(Thinking man)은 정년도 없지. 내가 나를, 정신을, 혼을 구했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었지. 캠퍼스 라이프를 선사한 곳으로 서울대를 기억할 때 앞으로 살아갈 60년, 70년이 새로운 삶으로 펼쳐질 거야. 있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창조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지 마라. 절망스러울 때 나를 구해줬던 음악이, 책이 지금도 도처에 있어. 브람스도 좋고 차이콥스키도 좋으니 틀어놓고 영혼을 세탁할 수 있는 거야. 그런 4년의 삶이 있어야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거야. 그 귀중한 4년을 일찍이 사회화돼서 값싸게 팔아넘기면 안 돼. 일평생 딱 한 번 있는 기회니까.” 
사진·정리=김남주 기자


이 동문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부여고 졸업 후 모교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시설 평론 ‘이상론’을 발표했고, 20대의 나이에 우상화된 기성 문단에 정면 도전한 평론 ‘우상의 파괴’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날렸다. 이후 당대 최고의 비평가로서 큰 활약을 했다.

1962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의 건축, 의상, 식습관, 생활양식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문화를 예리하게 분석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에서 먼저 발간돼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일본문화론 ‘국화의 칼’에 비견되며, 외국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첫 한국인 저작물이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세계적인 이벤트로 만들었으며 갓길, 자락, 쌈지공원 등의 신조어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밖에 월간 문예지의 초대 주간으로, ‘장군의 수염’ 소설가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대학교수로, 기호학 연구소 한국 최초 설립자로 학계·문화계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00년대 들어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성한 ‘디지로그’, ‘생명이 자본이다’ 등의 책을 출간해 정보화의 양극화에서 벗어나 후기정보화사회의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등 국가사회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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