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호 2024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가난한 죽음 구하는 게 나의 소명”
정중식 (의학90-96) 성남의료원 중환자의학과 전문의
“가난한 죽음 구하는 게 나의 소명”
정중식 (의학90-96)
성남의료원 중환자의학과 전문의
보라매병원서 행려병자 진료 전담
카메룬 응급의료센터 개원에 앞장
장기려의도상·이태석상 받아
“카메룬 돌아가 응급의료체계 구축할 것”
1월 29일 성남의료원에서 만난 정중식 동문은 “가난한 죽음을 구하는 게 소명”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신념에 찬 소년 같았다. 정 동문은 30대를 냄새나고 거칠고 술 취한 행려병자와 보내고, 40대에는 아프리카 땅에 응급의료 시스템을 이식하는 데 집중했다. 지금 일하는 성남의료원도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코로나 중환자를 돌보고 싶어 지원했다고 했다. 의대동창회가 지난 연말 ‘장기려의도상’을 준 배경이다. 정 동문은 앞서 ‘이태석상’도 받았다. 나이 들어 봉사하는 의사는 제법 봐왔지만, 젊을 때부터 뜻을 갖고 인술을 펼치는 이는 처음이다. 안정적인 서울대병원 교수직도 사직하고 전세로 살면서, ‘가난한 생명’을 구하는 그 마음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역대 장기려의도상 수상자 중 가장 젊은 것 같습니다.
“사람 이름이 붙은 상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이태석상도 그랬고요. 얼떨결에 받기는 했지만, 앞으로 삶이 더 조심스러워요.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면 그분들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것이니까 조심하면서, 그리고 검소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돼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지, 하는 꿈이 있었나요?
“그렇지는 않고요. 아버님(정영무 사학과49학번)이 이화여고 역사 선생님이셨는데, 과외도 하셔서 꽤 풍족하게 살았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과외가 금지되고, 돈을 잘못 쓰셨는지, 집이 폭삭 망했습니다. 6학년 때는 신문 배달도 했으니까요. 크면 경영자가 돼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있었죠.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의사가 되셨어요.
“고등학교 때 ‘사랑이 꽃피는 나무’라는 의대생 드라마가 방영됐어요. 즐겨보면서, 의사보다는 의대생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최재성씨가 주인공이었는데, 그분이 아프리카로 가면서 시즌1이 끝나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성향이 이과 쪽이었고, 그 드라마 영향도 받아 의대에 입학하게 됐죠.”
-의대 생활은 재미있었나요?
“관악캠퍼스에서 예과 2년 동안 학생회장을 맡았습니다. 학생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죠. 즐겁게 보냈어요. 본과 와서는 2년은 방황하고 3학년 때부터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2기던데, 응급의학을 선택한 계기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응급의학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던 시절입니다. 새로운 의학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뭔가 모험적일 것 같았어요.”
-행려병자와의 인연도 응급실 근무하면서 시작된 건가요?
“그렇죠. 전공의 4년 차 때 보라매병원에 파견을 나갔는데, 4개월 내내 응급센터 내 행려병실을 전담했습니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하고 싶었어요. 가서 보니, 행려병실은 20병상 있는데, 인턴 1명 간호사 1명밖에 없고 완전히 방치돼 있었어요. 인턴 지도하고, 간호사에게 밥도 사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강릉에서 공중보건의 활동할 때도 행려병자들을 돌봤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동하시나요?
“그런 게 좀 있어요. 그런데 제가 행려 환자들을 정말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행려 환자들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싫었어요. 왜 저렇게 차별하고 못되게 굴까 싶었죠.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인권 개념이 약했을 때이기도 하고요. 공중보건의 시절 신앙을 가진 것도 영향이 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게 나의 관심사고, 나의 소명이구나 그런 확신이 들어서 더욱 매진하게 됐죠.”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안양샘병원으로 가셨던데, 서울대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요?
“지난해 작고하신 박상은 샘병원 원장님이 멘토 같은 분이세요. 모교 병원 응급의학과 주임교수님의 만류에도 가게 됐는데, 가서 제가 할 일이 많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응급의학과 2기이기 때문에, 모교 병원에 남아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당연한 코스였습니다. 주임교수님께 무척 죄송했죠.
그렇게 의국을 나왔는데, 샘병원에는 행려병자들이 거의 없었어요. 계속 있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감사하게도 주임교수님이 전화를 주셔서, 보라매병원에 자리가 났는데 갈 수 있겠냐 하셔서 보라매병원 조교수로 가게 됐죠. 보라매병원에서 행려병자들을 전담하는 보직은 없었지만, 제가 자원해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그들을 진료했습니다. 교수다 보니까 연구실적이 필요했는데, 제 역량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해 계속 일하기는 힘들었죠.”
정 동문은 보라매병원에서 행려병자를 담당하던 시절, 홈리스 정책을 개선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행려병자에게 등본상 부양의무자가 있을 때, 지원이 어려웠던 제도를 바로 잡았다. 부양의무자가 있더라도 부양할 능력이 안되거나, 의사가 없을 경우에는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꾼 것이다.
정 동문이 교수직을 더는 할 수 없다고 느끼던 때, 아이티 대지진 사건을 보면서 국제보건 활동에서 역할을 찾았다. 의대 선배인 월드비전 백남선(의학83-87) 구호팀장을 만나 구체적인 조언을 들었다.
“처음에는 말리셨어요. 제 아이가 두 살 때이기도 했고요. 이야기를 쭉 들어보시더니, 보건학 공부를 먼저 하라고 하시더군요. 네가 아무리 교수였고 의사였어도, 그런 마음만 갖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보라매병원을 사직하고 1년 영어 공부 후, 2012년 존스홉킨스 대학원 보건학 석사 과정에 들어갔죠. 11개월 동안 80학점을 이수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뇌경색 혈전용해술 후 회복한 환자와 함께.
-석사를 마치고 바로 카메룬 야운데 응급센터 부원장으로 가신 건가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원장 공모가 나왔어요. 하지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임상의학을 하기보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의, 재난 현장이나 개발도상국의 1차 보건의료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까요. 귀국할 때까지 공모가 안 된 모양입니다. 야운데 국립응급센터는 코이카(KOICA)에서 지어준 병원입니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급기야 외교부 개발협력국장까지 ‘가 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원장 타이틀은 맞지 않으니, 부원장 자격 정도로 가겠다고 했죠. 원장은 현지인이 해야 지속적으로 운영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지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카메룬은 연간 보건 지출 규모가 1조5000억원(우리나라는 180조 6000억원)에 불과한 빈국입니다. 인구 200만의 수도에도 번듯한 응급실이 없었어요. 전기로 작동하는 의료장비는 한 대도 찾아볼 수 없었고요. 2013년 카메룬에 가서 1년 7개월간 응급센터 개원 준비를 했죠. 봉사단원들이 23명이나 함께해 주셔서 열악한 환경임에도 계획대로 진행돼 2015년 6월 개원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개발협력을 통해 한 나라의 국립응급센터를 개원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일이에요.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카메룬 응급의료체계 개발을 위한 일입니다. 응급센터는 그냥 하나의 병원일 뿐이거든요. 응급환자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병원만 있어서는 어렵죠. 응급의료전문인력, 이송체계, 통신, 재난대응시스템, 응급의료정보 등 모든 요소가 갖춰져야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응급의료 전문의를 키우는 일이 중요한데, 작년에 시작이 됐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모교 병원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카메룬의 병원은 선지불 시스템이에요. 그리고 환자가 의료물품을 조달해 와야 하는 구조였어요. 약은 물론이고 주사기, 간호사가 끼는 장갑까지도요. 준비가 안 되면 진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시스템에서 응급의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죠. 환자의 중증도를 분류해 중증환자에게는 미리 조달해 둔 물품들을 이용하고 검사도 후불로 진행하는 ‘선치료 후지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미수금 발생 비율이 높아질 거라 예상됐지만, 제가 귀국하기 전까지 유지했습니다.
또 카메룬의 국민 영웅인 리고베르트송이라는 축구 선수와의 일화가 기억에 남아요. 지금 카메룬 축구대표팀 감독이죠. 그 선수가 뇌출혈로 쓰러져 우리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파리 병원으로 후송돼 회복했습니다. 파리로 후송될 때 수백 명이 병원을 둘러싸고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 캡틴 일어나라고 응원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덕분에 카메룬 응급의료가 많이 발전했다고 장관이랑 대통령이 감사 인사를 전해왔어요. 야운데를 출발해 두알라로 가던 열차가 전복돼 6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열차사고가 있었는데, 우리 응급센터의 체계적인 활동으로 인명 피해를 줄인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야운데 국립응급의료센터 전경.
-카메룬에 갔을 때 자녀도 어린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아내의 희생이 컸죠. 가족들과 입국한 첫날 밤, 만 네 살도 안 된 아들이 고열이 났습니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갈 만한 병원이 없어 덜컥 겁이 났고, 가족에게 미안하더군요. 카메룬에 있는 6년 8개월 동안 저는 말라리아에 5번, 아들은 4번 걸렸어요. 중학생이 된 아들은 아빠가 이제는 안정적인 의사로 활동하길 바라는 눈치입니다.”
-앞으로 계획을 들려주세요.
“코이카의 지원으로 카메룬 야운데응급센터의 응급의료체계 2단계 개발사업이 2023년부터 2028년까지 진행됩니다. 자문 역할을 하면서, 2029년 그 사업이 마무리되면 카메룬으로 다시 가고 싶어요. 2013~2020년까지 카메룬에 있으면서 했던 일들이 어떻게 보면 거시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죠. 이제는 조금 더 미시적인 부분들을 메워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지난해부터 카메룬에도 응급의학과 전문의 양성이 시작됐는데, 그렇게 교육받은 현지 의사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카메룬 응급의료의 기초를 놓는 데 기여했던 외국인으로 기억된다면 굉장히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마지막으로 한 말씀.
“카메룬에서 응급센터를 개원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긴 호흡과 조화로운 호흡의 중요성입니다. 야운데 응급센터는 가난한 죽음을 막기 위한 일종의 인공호흡기죠. 인공호흡기를 떼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발호흡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고요. 지속가능한 개별협력이란 결국 상대 국가가 자발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전쟁의 폐허와 빈곤에서 벗어나 선진 의료시스템을 구축하고 유능한 의료인력을 육성한 대한민국이 가난한 나라를 위한 인공호흡기가 되어주길 소망합니다.”
김남주 기자